구호보다 행동, 국민은 ‘진짜’를 찾아낸다[사진기자의 ‘사談진談’]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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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왼쪽 사진)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회의 배경현수막(백드롭)에는 각 당이 엄선한 구호가 쓰여 있다. 동아일보DB
24일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왼쪽 사진)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회의 배경현수막(백드롭)에는 각 당이 엄선한 구호가 쓰여 있다. 동아일보DB
변영욱 사진부 차장
변영욱 사진부 차장
세상을 기록하러 다니는 사람이 사진기자다. 불이 나도 달려가고, 축구 경기가 열려도 달려가고, 정치인들이 말싸움을 해도 달려가 사진을 찍는다. 사진기자들은 현장에 가서 얼마나 오랫동안 사진을 찍는 걸까?

불이 완전히 꺼지고 피해자의 슬픔이 최고조로 표현되는 시간까지, 축구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사진기자는 취재한다. 정치인들을 기록할 때는 ‘그림이 될 때까지’ 취재를 한다. 그래서 청문회에 나온 후보자들이 물을 마시거나 땀을 흘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잡지 않으면 계속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정치 사진에서 제일 어려운 현장 중 하나가 회의장이다.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들이 비슷한 양복 차림으로 앉아서 하는 회의는 단조로움 그 자체다. 회의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공개 회의로 전환되면 기자들은 신문에 쓸 만한 순간을 포착하지도 못한 채 현장을 떠나야 한다. 그런 날이면 마감시간 신문에 쓸 사진이 없어서 곤혹스럽다.

그런데 요즘 정치 현장에선 홍보 담당자들의 노력 덕에 사진기자들의 고민이 훨씬 덜하다. 사진이 잘 나오도록 조명을 설치하고 색깔을 신경 쓰고 포즈도 취해줄 뿐만 아니라 시선을 집중시킬 만한 구호나 메시지를 사진 앵글 속에 배치하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장면을 보자. 대통령 뒤에 설치된 백드롭(배경 현수막)에는 ‘나라답게 정의롭게’라는 흰색 글씨가 파란 바탕을 배경으로 쓰여 있다.

비슷한 색깔의 더불어민주당 회의실 백드롭에는 ‘일하는 국회, 코로나 경제 위기 극복’의 구호가 쓰여 있다. 야당인 미래통합당의 경우 “OFF 정치공세, ON 위기극복”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유권자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설득을 통해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과제는 선거를 앞두고 있는 여야 모두에 합리적인 정치 행위다. 정당의 입장에서는 과학자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복잡한 사실관계나 논리를 통한 설득보다는 간결한 구호와 그래픽으로 시선을 끄는 게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차별성이 거의 없는 정치 세력들을 비교하기보다는 자기 정서를 파고드는 간단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보고 입장을 정리하는 독자나 시청자들의 ‘인지적 구두쇠 전략’(최소한의 정보로 결정하려는 성향)이 문제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다.

어떤 프로세스가 작동하는지와 상관없이 한국 정치에서 간결한 구호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54년 이승만 정권에 반대한 민주당의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고, 1987년 민주화 세력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라는 8자 구호로 국민들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세력은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구호로 다시 대통령 선거를 이겼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때 시민사회단체들은 기가바이트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게 무능하다며 이명박 대통령을 2메가바이트(2MB)로 표현했고 이 표현은 사람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검색을 해보니 최근 여야 회의실 백드롭의 교체 시기는 보통 한 달쯤 되는데 야당이 훨씬 자주 바꾸는 것으로 확인된다. 7월에만 백드롭을 3번 바꿨고, 8월 들어서도 현재까지 3번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선거운동 기간이 아닌데도 자주 바뀌는 여야의 메시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과제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양한 구호는 아직 다양한 정책이 구현되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의 숙제가 남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볼썽사나운 몸싸움보다는 구호 싸움이 훨씬 점잖다. 하지만 혹시 정치권이 바라보는 국민의 수준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본다. 잘 준비된 정책보고서와 숫자로 표현되는 성과보다는 선악 구분이 분명해 보이는 구호로 지지자들을 결속시키고 정치적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중도층을 끌어오는 데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점점 새로워지고 화려해지는 정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국민들의 예리한 시선이 아직 있다는 점이다. 지난 수해 복구 작업 봉사 모습 사진을 SNS에 올렸던 정치인들 중에 누군가는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고 오히려 오물을 묻힌 채 화장실을 청소하는 모 의원은 박수를 받았다. 탁상에서 만들어 낸 구호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국민이 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 앞에 사진을 내놓는 일은 두렵다. 이러고 보니 글과 사진 그리고 똑똑한 독자들의 취사선택을 통해 진실이 완성되는 것 같다.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
#구호#행동#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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