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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아플 땐 쉬어도 된다는 직장 분위기 자리 잡아야[광화문에서/이종석]

입력 2020-08-20 03:00업데이트 2020-08-20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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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정책사회부 차장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대국민 설문조사를 한 적 있다. 응답자의 54%가 생활방역 5대 수칙 중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게 아프면 3, 4일 쉬는 거라고 했다. 거리 두기나 30초 손 씻기, 하루 두 번 환기를 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구인구직 업체가 직장인 약 1100명에게 물었더니 90% 이상이 ‘아파도 출근한 적 있다’고 했다. 이유로는 ‘회사, 상사 눈치가 보여서’라는 대답(복수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국내 기업 10곳 중 4곳가량은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으로 아플 때 쓸 수 있는 병가(病暇) 규정을 두고 있다. 근로자 100∼299명 사업장은 약 65%, 300∼999명은 70%, 1000명 이상 사업장은 80% 정도가 그렇다. 유급병가를 둔 곳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직장인들은 아파도 쉬기 어렵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 데는 병가가 법으로 규정돼 있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엔 유급이든 무급이든 병가 규정이 없다. 병가는 법의 보호를 받는 권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공무원이라면 국가·지방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1년에 60일까지 유급병가를 쓸 수 있다. 근로자가 부모나 배우자, 자녀, 조부모, 장인, 장모 등 아프거나 다친 가족을 돌보기 위해 쉴 수 있는 권리는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아플 때 쉴 권리가 법으로 보장돼 있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19 관련 브리핑으로 TV에서 거의 매일 볼 수 있게 된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이 사무관이던 1999년의 일이다. 당시 국민건강보험법 제정과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던 김 차관은 지급할 수 있는 급여 중 하나로 상병(傷病)수당을 법안에 담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엔 상병수당이라는 게 낯선 제도였던 듯하다. 상병수당은 ‘업무와 관련이 없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일하지 못할 때 지급하는 공적보험이다. 건강보험법엔 ‘상병수당 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 아직 도입되진 않았다.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뒀지만 시행하지는 않고 있다. 현재 업무와 연관이 있는 부상이나 질병일 경우 산업재해보상보험 수급 근로자는 요양급여와 함께 상병수당 격인 휴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한 달 전 문재인 대통령이 “아프면 쉴 수 있는 상병수당의 시범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아프거나 다친 근로자가 소득 감소에 대한 걱정 없이 쉴 수 있게 사회안전망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런 발표가 있자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상병수당을 도입하면 적게는 연간 8000억 원, 많으면 1조7000억 원가량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재원 확보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병수당 도입을 위해 필요한 변화의 첫 번째로 ‘병가의 법적 권리 보장’을 꼽는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아직 상병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인데 그래도 미국은 ‘가족 및 의료 휴가법’에 병가 규정이 있다. 상병수당 제도가 잘 굴러가려면 ‘아플 땐 쉬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종석 정책사회부 차장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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