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뉴딜’ 고속도로에 횡단보도부터 치워주세요[광화문에서/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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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산업1부 차장
김재영 산업1부 차장
간만에 가슴 설렜다. 갑갑한 뺄셈식 과거 논쟁이 아니라 덧셈식 미래 비전을 보여준 것 같아서다.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한국형 뉴딜’ 얘기다. 스케일부터 남다르다. 국비만 114조 원, 지방비와 민간 투자를 포함하면 160조 원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의 22조 원 ‘녹색성장’(4대강 사업)이나 박근혜 정부의 21조 원 ‘창조경제’와는 규모부터 차원이 다르다. 핵심은 58조 원 규모의 디지털 뉴딜이다. 디지털 DNA(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생태계 강화, 교육 인프라의 디지털 전환, 비대면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SOC) 디지털화 등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경험상 숫자로 표시된 예산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쏟아부은 예산이 마침 160조 원 정도다. 결과에 대해선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끝나지 않는 고용한파 속에 일자리 예산 수십조 원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다. 예산이야 어떤 이름을 붙여서라도 맞출 수 있다. 공공기관의 PC를 모두 교체하고 디지털 뉴딜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예산이나 인프라 구축보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정부의 의지다. 디지털 경제에 맞게 규제를 획기적으로 정비해 마음 놓고 투자해도 되겠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막힘없이 달릴 수 있다는 자신이 없으면 액셀 페달에 쉽게 발이 가지 않는 법이다.

50년 전 경부고속도로가 막 개통했을 땐 고속도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하거나 자전거와 우마차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고속도로에 횡단보도를 깔거나 과속방지턱을 놨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실없는 상상 같지만 지금도 혁신산업에선 감속, 정차, 심지어 퇴출이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수시로 일어난다.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산업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기존 법령의 제약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5세대(5G)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는 통신 3사에 수십조 원의 투자를 독려하지만 한편으론 3조 원대 주파수 재배정 비용을 요구하고, 보편 요금제와 과징금으로 압박하며 투자 여력을 막는다. 대기업 진출이 제약된 소프트웨어 산업은 외국 기업들이 이미 장악했다.

디지털 경제 추진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직 계획이 없는 것 같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달 15일 디지털 뉴딜 세부 브리핑에서 “서로 소통하고 조금씩 양보하자는 의미의 ‘한 걸음’ 정책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좋은 말이긴 한데 이런 어정쩡한 ‘사회적 대타협’ 기조 속에 타다와 카풀이 멈춰 섰다. 구조 전환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그대로 과감하게 추진하되 이 흐름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은 별도의 정책으로 포용해 어루만져야 한다. 고속도로에선 쌩쌩 달리게 하되 안전한 보행로는 따로 만들자는 얘기다.

디지털 뉴딜이라는 미래 비전의 성공을 위해 규제 정비 등 제도적 보완 조치가 신속하게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입법 속도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상임위원회에 법안이 상정되고 본회의를 거쳐 법률로 공포되기까지 이틀이면 족하다. 176석의 힘을 이럴 때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재영 산업1부 차장 redfoot@donga.com
#디지털 뉴딜#한 걸음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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