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감독의 ‘대나무 숲’[오늘과 내일/김종석]

김종석 스포츠부장 입력 2020-07-04 03:00수정 2020-07-04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전설의 명장도 힘들 땐 산에 올라 고함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아예 친구처럼
김종석 스포츠부장
“아주 죽겠어, 살아 있는 게 기적인 거 같아.”

고희를 넘긴 프로야구 감독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몇 년 전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김응용 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79)이다. 당시 김 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한화는 일찌감치 꼴찌를 예약한 상태였다. 3할대 승률로 김 회장의 통산 24시즌 가운데 최악. 한국시리즈(KS) 10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운 ‘코끼리 감독’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화를 삭이는 방법을 털어놓았다. “등산이 취미야. 산에 가면 혼자 소리를 질러. 김태균(한화 4번 타자) 이 ××, 이렇게 퍼붓기도 해.” 오죽 답답하면 자식뻘 되는 선수까지 입에 올렸을까.


김 회장을 떠올린 건 며칠 전 프로야구 SK 염경엽 감독(52)이 경기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2개월 절대 안정 소견을 받아서다. 지략이 뛰어나 ‘염갈량’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였지만 성적 부진에 식사는 거의 못 하고 줄담배만 피웠다.

주요기사

프로야구 감독은 ‘지도자의 꽃’이라 부른다. 미국에서 야구 감독만은 매니저라고 한다. 다른 스포츠 감독은 모두 헤드코치다. 야구 감독이 경영자나 관리자의 역할까지 온갖 업무를 처리했던 데서 유래했다.

그만큼 대우도 해준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3년 동안 28억 원을 받는다. 염 감독의 계약 조건은 3년 25억 원. KBO에 따르면 이번 시즌 국내 감독이 받는 보수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연평균 4억2000만 원이다. 국내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조사한 매출 상위 300대 기업의 미등기 임원 평균 보수(2018년 기준)는 2억6670만 원. 엄청난 부와 권한이 따르지만 지도자의 고뇌와 중압감은 상상 초월이다.

프로야구 감독은 흔히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된다. 두산의 오랜 팬으로 20년 넘게 지휘를 하고 있는 정치용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야구단과 오케스트라는 포지션에 따른 역할에 충실하면서 얼마나 팀워크와 기량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프로야구 감독과 지휘자의 역할은 무척 닮았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카라얀이 ‘못하는 단원들을 다 묶어서 물에 빠뜨리고 싶다’고 하더라.” 정 감독이 전한 얘기다. 전설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명장 김응용 회장과 동병상련이었던 모양이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까지 생긴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카라얀은 원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프로야구 감독은 2, 3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 중도 사퇴하는 경우도 많다. 바늘방석에 앉은 감독을 파리 목숨에 비유하다 보니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5년 연속 KS에 올라 3번 우승한 김태형 감독은 통풍과 게실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졌다. 가끔 골프를 치거나 친동생에게 위탁해 키우는 몸무게 100kg에 이르는 대형견 2마리와 시간을 보내는 게 낙이다.

리더는 심신이 지쳐도 고단한 내색 한번 하기 쉽지 않다. 김태형 감독은 선수나 코치 앞에선 절대로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사 대표가 직원들에게 힘들다고 하면 피부에 와닿을까요. 후배들도 꿈이 감독 아니겠습니까.”

어디 야구 감독뿐이랴. 각자 삶의 매니저인 우리 모두에게 힘겨웠던 2020년의 절반도 어느새 끝났다. 야구에서 5회말이 끝나면 4분의 클리닝 타임을 갖는다. 운동장에서 흙을 고르는 동안 감독과 선수들, 심판진도 숨을 고른다. 스트레스는 라틴어 ‘stringere’에서 파생됐다. ‘꽉 조인다’는 의미. 잘 풀어야 오래 달릴 수 있다. 올해의 후반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잠시 내려놓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 산에라도 가보면 어떨까. 사람 없는 숲에 가서 소리라도 질러 보자.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김종석 기자의 더 많은 글을 볼 수있습니다.기자 페이지 바로가기>

#프로야구#스트레스#염경엽#김태형#kbo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