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일어난 방’[횡설수설/박중현]

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0-06-20 03:00수정 2020-06-24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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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영화에 나오는 백인 기병대 대장이 생각난다.” 지난해 4월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이렇게 비난했다.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학살자로도 비판받은 제7기병대 커스터 장군의 콧수염과 고집 센 표정을 볼턴에게서 발견했던 모양이다. 작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회담이 ‘노딜’로 끝난 책임을 볼턴에게 돌리며 한 말이었다.

▷볼턴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이 미국 정가를 뒤흔들고 있다. 어제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트럼프가 김 위원장에게 ‘낚여(hooked)’ 회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는 내용이 공개됐다. 볼턴은 또 김 위원장이 트럼프에게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브루클린 다리를 판 것’이라고 비판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팔아먹었다’는 뜻의 미국 표현이다. 미북 비핵화 외교에 대해선 ‘한국의 창조물’이란 말로 정상회담을 주선한 문재인 정부에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볼턴은 미국 외교계의 대표적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발탁됐고 아들 부시 대통령 때 국무부 차관, 유엔 주재 미 대사로 북핵 문제를 다뤘다. 2002년 이라크 이란 북한 3개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제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그가 작년 하노이 회담에서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의 ‘리비아 모델’을 꺼내들자 당황한 북한은 협상을 결렬시켰다.


▷리비아 모델은 독재자 카다피 원수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북한 정권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방식이다. 게다가 66시간 기차로 이동한 ‘최고 존엄’에게 망신을 준 볼턴은 북한엔 국적(國賊)이나 다름없다. 작년 단거리미사일 발사를 볼턴이 비판하자 북한 외무성은 “전쟁광 볼턴은 인간 오작품”이란 반응을 내놨다. 트럼프에게도 작년 9월 해임된 볼턴이 재선 가도의 큰 걸림돌이 됐다.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미친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을 때 다 망했다”라고 힐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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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이 경쟁적으로 책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자기비판이 결여돼 있다”고 꼬집는 건 오만에 가까운 볼턴의 캐릭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동맹국 관계, 인종차별 문제 등에서 안팎의 신뢰를 잃어가는 지금 볼턴의 폭로 쪽에 더 믿음이 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연일 막말, 도발을 이어가다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까지 뻔뻔스레 떠드는 북측 태도를 보면 그들이 절대 핵을 포기할 리 없다는 볼턴의 지론이 선견지명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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