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채권과 해밀턴 모멘트[동아광장/하준경]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독일-프랑스의 유럽회복기금 합의
美연방 탄생시킨 국채통합과 유사
빚을 하나로 묶어 연대-상생 이뤄내
위기극복 위한 韓국채발행 구상
‘공동의 이익’이란 신뢰 있어야 성공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독일어로 ‘부채’, 즉 빚(Schuld)은 ‘죄’라는 뜻도 갖고 있다. 그만큼 국가부채에 대한 독일의 태도는 엄격하다. 지난 7년간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의 80%대에서 60%대로 낮췄다. 이런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최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7500억 유로(약 1028조 원·유럽연합 국내총생산의 3.7%) 규모의 ‘유럽 회복기금’ 구상에 합의했다. 유럽연합 이름으로 채권을 찍어 빚을 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 중 5000억 유로를 코로나로 피해를 본 회원국들에 대출이 아닌 보조금으로 나눠준다는 것도 놀랍다.

함께 빚을 내 나눠 쓴다는 이 구상이 5월 27일 발표되자 유로화는 강세를 보였다. 기금이 유럽 경제의 회복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럽연합이 통화동맹을 넘어 재정동맹으로, 그리고 언젠가 미국 같은 연방국가로 발전할 확률이 커졌기 때문이다. 독일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는 이에 대해 유럽에도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즉 ‘해밀턴 모멘트’가 왔다고 말했다. 해밀턴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여러 주가 빚더미에 앉았을 때 각 주의 빚들을 통합해 연방국채로 만든 바 있다. 이를 발판으로 미국은 느슨한 연합체가 아닌 강력한 연방국가가 됐다.

그럼 유럽연합이 대규모로 빚을 내면 갚는 데 문제는 없나. 탄소세, 디지털세, 금융거래세 등 공동 징세가 거론되나 충분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 수준의 지위를 갖는 존재가 빚을 내면 문제가 달라진다. 빚을 계속 돌려 막을 수 있는 능력, 즉 화폐발행권과 비슷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쓰는 지폐도 회계상으론 중앙은행의 부채다. 그러나 누구도 중앙은행에 지폐를 들고 가 빚 갚으라고 하지 않는다. 법이 지폐의 통용을 보장하고, 모두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이라고 믿는 예금도 금융시스템이 창조한 부채다. 누군가 대출을 받으면 은행은 통장에 그만큼 숫자를 찍어주는데, 그 숫자를 전달받으면 우리는 돈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은행 금고 속 준비금은 통장에 찍힌 숫자들보다 훨씬 작다. 그렇다고 모두 은행에 가 앞다퉈 현찰을 찾지는 않는다. 이자나 서비스가 필요하고, 또 법 제도로 통장의 숫자가 지켜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채도 비슷하다. 국가가 망해서 청산하지 않는 한 국채를 모두 상환할 일은 없다. 국가가 국채를 다 갚아버리면 연기금, 보험, 금융회사들은 안전자산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경제가 커지고 안전자산 수요가 느는 만큼 국채가 늘어줘야 금융도 원활해진다. 중앙은행도 시장에 국채가 충분해야 이것을 사고팔아 돈의 양을 조절하기 쉽다. 국채시장이 없으면 그 나라 돈이 국제통화가 될 수도 없다.

물론 국채 발행은 정부 입장에선 시장에 상장돼 상시 평가받는 일이니 노고는 클 것이다. 국가의 성장잠재력과 징세능력을 보여 국채의 시장 가치를 높여야 하고 적정 수준에서 민간의 자금 조달과도 조화를 이뤄야 하니 말이다. 그래도 국가는 영속적이니 죽기 전에 빚을 갚아야 하는 개인이나 망하기 전에 빚을 갚아야 하는 기업에 비해선 작은 돈으로 큰돈을 만드는 지렛대 효과를 쓰기에 더 유리하다. 유럽연합도 국채의 이런 이점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해밀턴의 국채 해법이 새삼 주목받는 건 그가 이해관계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와 상생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빚이 많은 주들과 적은 주들의 빚을 통합한다고 하면 부자 주들은 빚을 떠안는 느낌을 갖게 된다. 돈이 많은 이들은 공동채무보다는 각자도생에 이끌리기 쉽다. 그럼에도 해밀턴은 타협을 통해 국채 발행을 성사시켰고, 산업정책으로 공동자산을 만들어 제로섬이 아닌 상생의 가능성을 보였다.

위기 극복을 위한 공동채무,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그린뉴딜과 디지털화 등을 표방하는 유럽 회복기금은 우리나라의 국채 발행 및 뉴딜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런 계획들이 성공하려면 각자도생보다는 연대와 상생이 우월함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함께 마련한 돈이 일부만을 배불리거나 지대(地代)로 흡수되지 않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나라를 물려주는 데 쓰인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코로나 채권#해밀턴 모멘트#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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