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과 보드카[오늘과 내일/이승헌]

이승헌 정치부장 입력 2020-06-02 03:01수정 2020-06-0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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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틀, 문법 깨는 역발상 절실한 통합당
김종인과 1년 재활, 좋든 싫든 마지막 기회
이승헌 정치부장
“이게 누가 선물이라고 준 건데….”

9년 전인 2011년 가을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 자연인 신분이었던 김종인 전 의원이 처음 보는 술 한 병을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젊은층에게 인기가 많은 덴마크의 D 브랜드 보드카였다. 겉을 보니 가격은 병당 3만 원 정도, 도수는 40도였다. 당시에도 70세를 넘긴 ‘고령’. 함께한 젊은 사람들 마시라고 가져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앞의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한두 잔 연거푸 마시더니 계속 마셨다. “난 독주가 깨끗해서 좋아.”

2012년 대선 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 몇만 원에 파는, 처음 보는 위스키를 들고 왔다. 도수 45.8도. 그는 50도 가까운 위스키를 “크∼” 하면서 씹듯 음미했다.


미래통합당의 재건을 맡게 된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관련된 여러 장면 중에서 필자는 독주(毒酒)를 즐기던 장면들이 유독 자주 떠오른다. 백발의 노(老)정객이 젊은 사람들도 버거워할 불같은 술을 들이켜는 이미지와 그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인 ‘의외성’이 묘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인 것 같다. 박근혜 당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입히고, 다시 문재인 당에 들어와 총선에서 1당을 만들어낸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분명 호불호가 엇갈린다. 누구는 정치 기술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관습화된 한국 정치에서 반 발짝 앞서가 “어!”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역발상 전략전술에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 흔치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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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이런 전략적 효용은 지금은 갈라선 친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4·15총선 직전 여권 최고위급 인사는 통합당 선대위원장으로 합류하는 김종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종인 하면 이를 가는 사람이다. “왜 공천권도 안 받고 통합당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김종인이 공천까지 했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편하게 선거를 치르지는 못했을 거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을 뒤엎으려는 사람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종인 비대위가 1일 출범했다. 필자는 김 위원장이 보수 정치에 역발상과 역동성의 씨앗만 제대로 심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보수가 맥을 못 추는 건 정책이든 언행이든 너무 뻔하고, 창의성도 없고, 그래서 좀처럼 정치적 다이내믹스를 못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선 주자 육성은 그 후의 일이다.

아직 통합당엔 김종인 체제를 반대하는 자강파가 있다. 물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조직이 건강하다. 한때 집권세력이 이젠 80대 노인에게 변화의 키를 쥐여준 게 자괴감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다. 별명이 ‘여의도 차르’인 김 위원장의 독불장군 스타일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강파의 논리라는 게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 수준이다. 이런 인식은 통합당 사람들이 좋아하는 골프로 치면 만년 백돌이(초보)가 코치에게 레슨 받아 교정할 생각은 안 하고, 잘못된 습관과 폼으로 끝까지 혼자 연습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정객에게 제1야당의 혁신, 더 나아가 차기 대선 지형 조성까지 맡기는 게 최선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면 이젠 김종인 비대위가 보수를 추슬러 슈퍼여당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옳다. 총선 후에도 지리멸렬한 지금의 보수로는 하반기부터 폭풍처럼 몰아칠 여권발 한국 개조 드라이브를 놓고 건전한 토론을 벌이거나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2022년 3월 차기 대선 전 보수 재활의 마지막 기회가 될 1년이 이제 막 시작됐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미래통합당#김종인 비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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