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석호]참여의 제도화가 간과한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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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참여 위원회들의 성과가 현 정부의 성패를 가를 것
특정 계층·극단적 주장 경계하고 약자 배려·반대의견 설득해야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누구라도 촛불정신을 계승하는 적자이길 바랐을 것이다. 국민 1000만 이상이 직접 광장에 나와 무능하고 부패한 군주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촛불 행렬은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촛불혁명의 정통성을 오롯이 품 안에 둔다면 1000만 지원군을 뒷배로 두는 정치인이 되는데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겠는가.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취임과 동시에 대통령은 촛불정신을 계승해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국민의 나라, 모든 특권과 반칙, 불공정을 일소하고 차별과 격차를 해소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약속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다. 국민도 대통령의 노력에 높은 지지율로 화답하고 있다.

하지만 촛불은 하나의 색깔로 그려지지 않는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어도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저마다의 주장을 담고 있다. 목적을 이루면 깃발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참여민주주의에서 정치적 리더십의 성패는 소통과 협의를 통한 의사 결정의 제도화, 공정한 제도의 운용, 투명한 정보의 공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국민을 설득하는 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다.

현 정부는 집단 간 갈등이 첨예하거나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참여의 제도화를 시도하고 있다. 총리실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기획재정부의 국민참여예산제도, 국가교육회의의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가 이에 해당한다. 정부의 노력이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을 지적하려 한다.

우선,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시민이 전체를 대표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서구의 참여민주주의 실험에서 드러난 공통적인 문제는 아는 게 많고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주장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점이다. 지도자는 이를 대중의 평균적 의견으로 인식해 최종 결정에 반영하고 이 결정으로 만들어진 정책은 사회적 약자가 아닌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백서에 따르면, 시민토론회에 참가한 471명 중 약 40%가 5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가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참여 불평등의 악순환은 참여민주주의가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둘째, 참여의 제도화는 언제든지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통과의례로 변질되곤 한다. 기재부는 국민이 예산사업의 제안, 심사, 우선순위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국민참여예산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투명성 제고의 측면에서 좋은 시도로 보이지만, 실제 이 제도의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하는 이가 많다. 예산과 재정은 상당한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은 접근이 어렵다. 그래도 기재부는 대통령의 국정 기조에 부응하는 참여제도 실시라는 명분을 취하고, 이익집단은 자신의 이해를 담은 사업을 제안하는 실리를 챙기며, 관련 부처는 제안된 사업 중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자율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결여된 참여의 제도화는 한 번의 잔치로 끝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공론장에서는 극단적인 주장이 주목을 받는다. 토론을 통해 한쪽에 치우친 주장이 자연스럽게 걸러지면 좋지만 대개는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다. 국가교육회의의 공론화위원회가 대학입시제도를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입시정책처럼 주제가 엄중하고 복잡하며, 모든 국민이 이해관계자인 사안에서는 이해가 쉽고 선택에 부담이 없는 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대중적 지지가 높은 안이 항상 선한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토론과 숙의의 중요성은 남북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보여준 전쟁 종식에 대한 의지는 국민을 들뜨게 하지만 남북 공존과 평화 정착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의 차이가 선명해질 것이며, 내부 갈등도 격화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려면 현실적인 갈등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며 그 출발은 소통과 협의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참여의 제도화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할 역사적 실험이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국민 참여 위원회#참여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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