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것 보니 아직도 한국에 적응이 덜 됐군.” 지난해 여름 미국 특파원 생활(3년)을 마치고 귀국한 뒤 ‘한국의 이런 점이 아쉽다’는 유의 칼럼을 쓰면 이런 품평을 하는 지인들이 꼭 있다. 보행자가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 앞에서도 일시 멈춤 하지 않는 몰상식한 차량을 지적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한국이지’라는 자조(自嘲)에서부터 ‘그래도 한국이지’라는 자족(自足)까지 반응의 폭은 넓었다. 공통된 충고는 ‘한국에 맞춰 살아’.
“미국 사는 친구들이 ‘북한 때문에 무서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하면, ‘총기 사고가 빈발하는 미국보다 훨씬 더 안전해’라고 대꾸한다.”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한국의 철저한 총기 규제’를 기획기사로 다루면서 소개한 주한 미국인의 얘기다. 신문은 “2016년 기준으로 인구 5100만 한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356건)은 인구 270만 시카고(762건)의 절반도 안 된다”고 부러워했다. 미국은 총기 소유를 생명 자유 행복 같은 자연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여겨온 나라다. 대규모 총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도 한국 같은 총기 규제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에 출장 왔던 이 기자도 귀국 후 “빨리 미국에 적응해”라는 충고를 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자 직업병인지 자꾸 비교하며 상상하게 된다. 최악의 교통 정체로 악명 높은 뉴욕에서 교통사고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운전자나 탑승자가 다치거나 숨진 추돌사고인 경우 출동한 경찰이 편도 3∼5차로 대로를 통째로 가로막는다. 구급차가 도착해 부상자를 이송하고 사고 수습이 안전하게 될 때까지 차량 통제를 풀지 않는다. 한 관광택시 기사는 익숙한 듯 “내가 겪은 최고기록은 5시간이다. 손님용 ‘성인 기저귀’를 비치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뉴욕 경찰이 무능한 건지, 시민 인내심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도로 위 교통사고든, 철로 위 기차사고든 현장 통제권을 가진 경찰이나 소방관의 안전조치가 끝날 때까지 “나 바쁜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라고 항의하는 시민을 못 봤다. 그렇게 기다리는 게 결과적으로 가장 안전한 선택임을 체감해왔기 때문일까.
목줄 풀린 개를 구조하려고 출동했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젊은 소방관들, 끊임없이 지적해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소화전과 소방도로 가로막는 불법주차’,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면 이런 한국엔 적응하면 안 될 것 같은 오기가 생긴다.
뉴욕 맨해튼의 소방차나 구급차 사이렌 소리는 경이로울 정도로 시끄럽고 요란하다. 밤이고 낮이고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맨해튼 살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다. 직접 음량(데시벨)을 측정해보지는 않았지만 서울에선 그런 엄청난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응급차량 사이렌이 너무 시끄럽다’는 민원이 적지 않다는 뉴스가 있던데 혹시 그 영향 때문인가. 119 측이 “전쟁 났을 때 총과 대포도 시끄럽지 않게 사용해 달라는 얘기냐”고 반박했다니, 웃고 넘길 수준의 민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국가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도,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부가 동분서주하는 이유도 결국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그 생명을 지키고 구하는 일은 무엇보다 고귀하다.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커도 되는 이유와 자격은 그래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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