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대리만족의 달콤함이 영혼을 잠식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살아가는 이유 중에 ‘만족’이 있습니다. 만족(滿足)이란 한자의 뜻(찰 만, 발 족)이 흥미롭습니다. 전문가의 의견보다는 그냥 연상되는 바를 내세우면 ‘부지런히 걸어 다녀서 삶을 채워야 만족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불만족한 사람의 삶은 정말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만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엄중한 현실에 머물러 고통을 계속 참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찾는 방법이 대리 만족입니다. ‘만족’은 ‘마음에 흡족함’이고 ‘대리’는 ‘남을 대신해 일을 처리함’입니다. 대리 만족은 자신이 스스로 그 행위를 하기보다는 남이 하는 행위를 보거나 듣거나 읽는 데서 만족을 얻는 겁니다. 실천이 가능한 방법으로는 책 읽기, 스포츠 관람, 영화 감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바가 다르나, 책 읽기는 극히 개인적인 행위여서 일단 오늘은 제외합니다.

많은 사람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고 영화를 즐겨 봅니다. 야구장 관중석의 함성은 하늘을 찌릅니다. 대형 영화관에서는 종영과 함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할까요? 대리 만족의 뿌리는 환상의 충족입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잘합니다. 박진감과 자신감이 넘칩니다. 관중석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우리 선수를 응원합니다. 드디어 또 이겼습니다. 박수가 쏟아집니다. 영어 인터뷰 후에는 우리말로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안경 쓴 내 모습과 그의 모습이 내 마음에서 겹칩니다. 동일화(同一化)입니다. 외신은 “돌풍이 태풍이 되었다” “코트의 슈퍼맨”이라고 전해옵니다. 국내 언론은 “‘국민 영웅’에 푹 빠진 한국” “약점을 운명으로 바꾸다” 등 기사를 쏟아냅니다.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 정현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아, 대한민국! 감동을 받았습니다. 식당 밖으로 나왔습니다. 따뜻하게 배를 채웠어도 기록적인 한파에 여전히 몸이 떨립니다.

극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선이 악을 벌주고 물리치는 주제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그중에서도 평범한 사람이 사회의 악과 싸워 이기는 내용이면 더욱 좋습니다. 아직도 영화의 감흥이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사람이 저를 거칠게 밀치고 지나갑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쫓아가 영화에서처럼 해결하려다가 저는 영화 속 주인공,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발길을 돌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대리 만족이 만족감을 줄까요? 지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환상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제 상황이 아닌 환상의 힘을 빌려서도 만족감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나요? 사소한 예를 들면 아주 추운 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 판매대 옆을 지나가는 광경을 눈앞에 떠올려 보십시오. 더운 기운이 몸에 돌면서 잠시 추위를 잊을 수 있습니다.

대리 만족의 최고봉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교육 투자입니다. 오직하면 교육열(敎育熱)이라고 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등으로 이어지는 학교 교육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미숙합니다. 교육부가 연이어 내놓는 정책이 그래서 갈팡질팡하며 사회적인 혼란을 일으킵니다. 피가 가장 끓는 대리 만족이 교육열임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강요한 후유증입니다.

나는 못 배웠지만 자식만은 제대로 가르쳐서 출세시켜 번듯하게 만들겠다는 농촌 부모의 한 맺힌 노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힘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분들이 재산 목록 1호였던 소를 팔아서 등록금 냈다고 해서 대학을 “소의 뼈로 쌓아 올린” ‘우골탑(牛骨塔)’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책의 성공은 환상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총체적 이해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대리 만족의 달콤함에 빠지면 마음의 균형은 무너집니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스스로 원하는 어떤 존재로도 변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자마자 여전히 춥고 배고픈 현실이 기다립니다. 스포츠 중계나 영화에만 탐닉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환상을 현실의 행동으로 이어가는 겁니다. 당연히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은 엉망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대리 만족의 행위를 완전히 제거하면 덜어내야 할 일상의 스트레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일 겁니다. 음향 기기의 고음과 중저음을 잘 섞어야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현실과 대리 만족 사이에서도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삶이 윤택해집니다.

아직도 “개천에서도 용 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쳐서 얻으려는 대리 만족도 위험합니다. 부모의 기본 책무에는 최선을 다하되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에게 투사해 부모 대신 이루게 만들려 하다가는 자식의 꿈도, 부모의 꿈도 거품으로 날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만족을 만족으로 바꿔 나가는 노력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불만족을 주로 대리 만족으로 채우려 한다면 실현 가능한 목표의 달성은 점점 빗나가고 인생은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곳에서라도 찾아내려 합니다. 잃어버린 것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물건, 돈, 집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경력, 공부, 자존감, 자신감도 있습니다. 떠나버린 사랑이나 끊어진 관계도 대리 만족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은 훌륭하게 컸어도 부모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잃어버린 사회적인 지위를 다른 곳에서 보상받으려고 애쓰다가 몰락하는 모습도 흔히 보입니다. 연예인의 화려한 행보만을 보고 따라 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연예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리 만족은 잠시 달콤하게 입안을 적시는 설탕물과 같습니다.

대리 만족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자신의 인생을 대리 운전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 뿌리인 환상을 탐색해서 통찰로 이어져야 합니다. 내가 왜 어떻게 환상을 통해 대리 만족을 추구하느냐를 알아야 지나친 대리 만족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일을 막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