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정치를 虛業으로 끝내지 마시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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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일 동서문화 발행인·소설가
고정일 동서문화 발행인·소설가
정치의 결단은 탁월한 통찰력으로 이루어져야 성공하는데 개인적 이기심으로 이루어질 때 비극이 탄생한다. 김종필(JP) 전 총리에게는 운명의 결단이 3번 있었다. 5·16과 3당 합당 그리고 DJP(김대중+김종필) 공동 정권 선언이다. 1997년 11월 대선을 보름 앞두고 단일화 최종 담판을 발표하던 그날 새벽, 나는 JP 후보 선거대책위에 위원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위원장 이태섭을 비롯해 위원 15명이 함께했다. 단일화 교섭 대표인 김용환 의원이 결정 사항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김대중, 총리는 김종필, 그리고 장관 일곱 석을 맡는다. 2년 뒤 의원내각제 개헌을 한다.”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회의장 안을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이게 아닌데’ 가슴이 콱 막혀 왔다.

“모처럼 참석하셨으니, 한 말씀 하시지요.” 이태섭 위원장의 강권에 나는 입을 열었다. “총리, 장관 7명 맡고 2년 뒤 내각제 개헌을 말씀하시는데, 앞의 두 가지는 이루어지겠지만 내각제 개헌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DJ의 내각제 결심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되면 국민을 우롱하는 꼴만 됩니다. 국가적 중대 약속이 한낱 기만으로 끝난다면 어찌 바른 정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DJP 공동 정권은 깨지고 자민련 54석이 그들과 운동권의 공격으로 무참히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후보 단일화 결정은 자민련의 중대한 패착으로 정치 혐오감만 증대시키리라 봅니다.” 김용환 의원이 나를 노려보고 소란이 일었다. 이것이 내 평생 딱 하루 정치에 관여한 일이다.

2년 뒤 총선. JP 낙선 운동이 벌어지고 자민련 54석이 14석으로 줄어드는 파탄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JP에게 정치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들 모두 DJ가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JP가 김영삼(YS)을 대통령 만들고 민자당에서 쫓겨나던 때를 되새기며 나는 더더욱 정치 혐오가 치밀었다.

한운사는 세상을 떠나면서 JP는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친구라고 말했다. 3김 중 JP는 음악과 미술에 심취하고 케네디가 즐기던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를 애송하는, 이성과 감성을 갖춘 로맨티시스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JP의 이런 낭만적 성격을 술수 배신 선동이 앞서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결연하지 못하다고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한국 정치인들은 왜 탁월한 통찰력으로 국가에 헌신하다 물러나는 드골 처칠 호찌민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가. 카이사르는 현자의 정치 노년은 본 것 많고 아는 것 많고 정치심리 꿰뚫고 세태 변화 법칙을 투시할 수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JP는 ‘서산에 지는 해’라는 비아냥에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노라’ 다짐했지만 아직도 노을빛은 묘연하다. JP는 정치 노년의 지혜를 후학에게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정일 동서문화 발행인·소설가
#정치의 결단#이태섭#내각제 개헌 약속#한운사#통찰력#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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