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충고도 자주 듣게 되면 짜증나는 법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되면 화가 나서 보던 책도 덮게 된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이 꼭 그럴 것 같다. 변화 주문이 쏟아지지만 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긴 힘들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파도가 쳐도 바위처럼 꼼짝 않는다.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고 비리에 연루된 적은 더욱 없다. 늘 반듯한 이미지를 지켰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해도 신뢰를 보내는 견고한 지지층도 있다. 숱한 변화 요구에도 요지부동일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집권 이후 최저인 35%로 떨어졌다. 새누리당에서 ‘정윤회 문건’ 파동보다 더욱 악성이라고 여긴 ‘연말정산 대란’으로 민심은 흉흉해졌다. 등락을 거듭하는 지지율에 연연할 필요가 없긴 하다. 하지만 30% 아래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사태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1월 21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9일장을 치른 뒤 동생 근령, 지만과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피격 후 5년간 퍼스트레이디를 지내다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 양친을 모두 잃은 상태로 홀로서기를 했다. 그 18년간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겠는가. 정치에 입문한 뒤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정에도 파란이 많았다.
그런 만큼 ‘박근혜 스타일’은 쉽게 변할 수 없다. 아니 바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원칙과 신뢰라는 가치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찾기 힘든 그만의 브랜드였다. 굳이 힘들게 스타일을 바꾸는 대신 답을 찾으면 된다. 1972년 10월 유신 이전의 ‘젊은 박정희’의 리더십은 박 대통령이 현재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한 원로 정치인은 “박 대통령이 총기와 열정이 넘치던 시절의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탄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2월 10일 김정렴 비서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함병춘 국제정치특별보좌관 등 9명의 특보단을 출범시켰다. 특보단의 임무는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공식적인 것 외에도 대통령의 말벗이었다. 대통령은 특보들과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시국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했다. 언론인과 교수 등 지식인들의 모임인 ‘수요회’를 통해서도 여론을 청취하며 귀를 열고 살았다.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의 의견에도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작년 신년회견 때 박 대통령은 일과 후 보고서를 보는 데 여념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보고서를 읽고 국정을 공부했으면 막힘이 없을 때가 됐다. 일과 후 보고서에 파묻히는 대신 젊은 날 아버지의 리더십을 기억하는 각계의 원로를 모셔서 지혜를 구해보면 어떨까. 인재를 아끼고 적소에 배치한 아버지의 용인술을 비롯한 국정운영 노하우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한 김학렬 부총리는 1972년 3월 21일 4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국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은 주역 중 한 명인 그는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그때 회의를 주재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너무 쓰루(김 부총리의 애칭)를 혹사시켜서 수명을 단축시켰다”며 화장실에서 통곡했다. 두 사람이 통음을 하는 날에는 김 부총리의 집까지 술자리가 이어질 정도였다. 시대는 달라졌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위험도 감수할 줄 아는 그런 참모가 지금 박 대통령에게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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