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오늘과 내일]‘젊은 박정희’에 답이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3일 03시 00분


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아무리 좋은 충고도 자주 듣게 되면 짜증나는 법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되면 화가 나서 보던 책도 덮게 된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이 꼭 그럴 것 같다. 변화 주문이 쏟아지지만 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긴 힘들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파도가 쳐도 바위처럼 꼼짝 않는다.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고 비리에 연루된 적은 더욱 없다. 늘 반듯한 이미지를 지켰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해도 신뢰를 보내는 견고한 지지층도 있다. 숱한 변화 요구에도 요지부동일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집권 이후 최저인 35%로 떨어졌다. 새누리당에서 ‘정윤회 문건’ 파동보다 더욱 악성이라고 여긴 ‘연말정산 대란’으로 민심은 흉흉해졌다. 등락을 거듭하는 지지율에 연연할 필요가 없긴 하다. 하지만 30% 아래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사태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1월 21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9일장을 치른 뒤 동생 근령, 지만과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피격 후 5년간 퍼스트레이디를 지내다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 양친을 모두 잃은 상태로 홀로서기를 했다. 그 18년간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겠는가. 정치에 입문한 뒤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정에도 파란이 많았다.

그런 만큼 ‘박근혜 스타일’은 쉽게 변할 수 없다. 아니 바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원칙과 신뢰라는 가치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찾기 힘든 그만의 브랜드였다. 굳이 힘들게 스타일을 바꾸는 대신 답을 찾으면 된다. 1972년 10월 유신 이전의 ‘젊은 박정희’의 리더십은 박 대통령이 현재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한 원로 정치인은 “박 대통령이 총기와 열정이 넘치던 시절의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탄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2월 10일 김정렴 비서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함병춘 국제정치특별보좌관 등 9명의 특보단을 출범시켰다. 특보단의 임무는 여론을 수렴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공식적인 것 외에도 대통령의 말벗이었다. 대통령은 특보들과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시국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했다. 언론인과 교수 등 지식인들의 모임인 ‘수요회’를 통해서도 여론을 청취하며 귀를 열고 살았다.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의 의견에도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작년 신년회견 때 박 대통령은 일과 후 보고서를 보는 데 여념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보고서를 읽고 국정을 공부했으면 막힘이 없을 때가 됐다. 일과 후 보고서에 파묻히는 대신 젊은 날 아버지의 리더십을 기억하는 각계의 원로를 모셔서 지혜를 구해보면 어떨까. 인재를 아끼고 적소에 배치한 아버지의 용인술을 비롯한 국정운영 노하우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한 김학렬 부총리는 1972년 3월 21일 4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국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은 주역 중 한 명인 그는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그때 회의를 주재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너무 쓰루(김 부총리의 애칭)를 혹사시켜서 수명을 단축시켰다”며 화장실에서 통곡했다. 두 사람이 통음을 하는 날에는 김 부총리의 집까지 술자리가 이어질 정도였다. 시대는 달라졌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위험도 감수할 줄 아는 그런 참모가 지금 박 대통령에게 더욱 절실하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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