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숨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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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라 작가의 ‘맥주가 있는 정물’.
김기라 작가의 ‘맥주가 있는 정물’.
숨결
이희중(1960∼)

오래전 할머니 돌아가신 후
내가 아는 으뜸 된장 맛도 지상에서 사라졌다

한 사람이 죽는 일은 꽃이 지듯 숨이 뚝 지는 것만 아니고
목구멍을 드나들던 숨, 곧 목숨만 끊어지는 것만 아니고
그의 숨결이 닿은 모든 것이, 그의 손때가 묻은 모든 것이,
그의 평생 닦고 쌓아온 지혜와 수완이
적막해진다는 것, 정처 없어진다는 것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둥글고 매끄러운 글씨가 사라지고
그대가 끓이던 라면 면발의 불가사의한 쫄깃함도 사라지고
그대가 던지던 농의 절대적 썰렁함도 사라지고
그대가 은밀히 자랑하던 방중술도 사라지고
그리고 그대가 아끼던 재떨이나 만년필은 유품이 되고
또 돌보던 화초나 애완동물은 여생이 고달파질터이니
장차 어머니 돌아가시면
내가아는으뜸김치맛도지상에서사라질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44세의 엄마는 대장암 말기 환자였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홀로 남을 아들에게 따뜻한 집밥을 손수 차려주는 것.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며 자신은 일하느라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 가느라 바빠 아침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째깍째깍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 앞에 선 아들의 바람도 소박하지만 간절했다. “엄마가 만들어준 밥을 먹고 싶다.” 무정한 운명은 그 꿈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TV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모자(母子)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집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삶의 끄트머리 여정에서 그토록 그리워한 것이 한 끼의 집밥이라니…. 그 밥의 의미는 떠나는 사람과 남아야 하는 사람의 영혼을 이어주는 끈끈한 유대감이었을 터다.

가난했던 유년기를 공유하는 중장년 세대들은 어머니가 해준 밥을 지상 최고의 식사, 최고의 보약으로 기억한다. 이희중 시인의 ‘숨결’에서도 할머니의 된장과 어머니의 김치를 최고의 맛으로 추억한다. 그 맛의 비밀은 미각의 차원이라기보다 ‘손때 묻은 것, 마음 깃들인 것, 시간이 고여 있는 것’(평론가 정끝별)에 닿아있을 터다. 하지만 현대인의 일상에서 따스한 정과 투박한 손맛이 녹아든 집밥은 아무나 누리기 힘든 사치로 변해가고 있다. 김기라 작가는 전통 정물화 대신 햄버거 감자튀김 같은 패스트푸드를 주목한 21세기 정물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단면을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때마침 가요와 예능에서 집밥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가수 김범수는 새 앨범 타이틀곡의 제목을 ‘집밥’으로 정했다. 사무실, 호텔방, 자동차에서 나 홀로 꾸역꾸역 음식을 삼키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는 ‘내가 쉴 수 있는 곳, 집밥’이란 가사를 가슴으로 공명하게 해준다. 하루 세끼 밥 차려먹는 것을 테마로 삼은 한 케이블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도 큰 인기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 들어간 두 남자의 ‘집밥 도전기’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남은 12월의 달력 한 장. 굳이 삶의 절박한 순간이 닥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은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솜씨라도 집밥에 도전해보면 좋겠다. 갓 지은 밥에 자반고등어구이와 계란말이. 단출한 밥상이라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세밑의 헛헛함을 달래주는 특효약이 될 것 같다. 텅 빈 마음에 스며드는 삶의 온기, 그게 바로 집밥의 마법이 아닐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숨결#맥주가 있는 정물#김기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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