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極地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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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제네시스’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제네시스’
極地에서
이성복(1952∼)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황제펭귄의 허들링 이야기를 아시나요? 매서운 남극의 추위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안쪽 펭귄과 바깥쪽 펭귄들이 위치를 바꿔가며 체온을 유지합니다.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이겨내는….’

광화문 지하철역에 있는 한 보험사 광고판이 연말의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붙든다. 자기 대신 혹한에 맞선 바깥쪽 펭귄과 기꺼이 교대하는 안쪽 펭귄과 사뭇 다른 인간 세상이 비교됐나 보다. 내 자리는 언제나 안쪽이라 굳게 믿고 얼음벌판에 바람막이 되어준 바깥쪽 사람들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사건에 온 사회가 뒤집어졌으니 말이다.

갑오년이 저무는 시점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 해마다 거른 적 없어도 올해는 유난히 아슬아슬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상처와 좌절이 컸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성복 시인의 ‘極地(극지)에서’를 충분히 공감할 만큼. 지금 서울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제네시스’전도 극한의 삶을 보여준다. 겨울이면 영하 6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툰드라에서 순록을 치며 살아가는 유목민 네네츠족의 일상이다. 혹한의 눈보라를 헤쳐 가는 사람들, 가도 가도 끝없는 얼어붙은 호수 빙판을 절룩거리며 걷는 북극곰 새끼, 모진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현대인. 막막한 삶은 모두 닮은꼴이다.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 한 해를 보내는 서글픈 회한도 그렇다.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따라 세밑이면 얽히고설킨 기억이 우리들을 옥조인다. 복잡한 실타래에서 어느 건 남기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지, 기억과 망각의 경계선에서 삭제 버튼을 눌러야 할 때다.

무언가 안 될 때가 참 많았다. 불안과 희망의 거대한 도돌이표로 이어지는 무심한 세월. 그 흐름 속에서 조금 불행하거나 조금 행복하거나 다 괜찮다. 그게 바로 삶이니까. 운명의 거친 발길질에 주저앉지 않은 것만으로 대견하지 않던가. 그러니 ‘각자의 극지’에서 살아남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좋을 터다. 바로 내가 나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

마지막으로 2014년을 봉인하기 앞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다들 애쓰셨습니다, 여러분!”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황제펭귄#허들링#이성복 시인#극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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