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84>만월(滿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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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滿月)
―김정수(1963∼ )

막내네 거실에서 고스톱을 친다 버린 패처럼 인연을 끊은 큰형네와 무소식이 희소식인 넷째 대신 조커 두 장을 넣고 삼형제가 고스톱을 친다 노인요양병원에서 하루 외박을 나온 노모가 술안주 연어 샐러드를 연신 드신다 주무실 시간이 진작 지났다 부족한 잠이 밑으로 샌다 막내며느리가 딸도 못 낳은 노모를 부축해 화장실로 가는 사이 작은 형이 풍을 싼다 곁에서 새우잠을 자던 아내를 깨운다 며느리 둘이 노모의 냄새를 물로 벗겨 낸다 오래 고였던 냄새가 흑싸리피 같은 피부를 드러낸다 술이 저 혼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다 단내를 풍긴다 작은형이 싼 풍을 가져가며 막내가 의기양양하게 쓰리고를 외친다 이번 판은 무조건 상한가, 막내 얼굴에 만월이 뜬다 고스톱 한 판에도 손에 땀이 찬다 허투루 버리는 피도 없는데, 목구멍을 거슬러 오르는 숨결이 꼴깍꼴깍 거칠다 어머니가 똥을 싸셨는데 아들들은 고스톱만 치네요 막내며느리의 거침없는 말씀에 형제들이 쓰리고에 피박까지 쓴다

공산명월(空山明月)이 연어 위에 붉다


결혼해 분가한 형제들이 추석이라고 막내 집에 모였다. 막내가 제일 너른 집에 사나보다. 명절에도 얼굴을 볼 수 없는 형제가 둘이란다. 가산을 독차지하거나 다 들어먹어 다른 형제들과 정을 뗀 장남이라든지, 가슴 철렁한 일이나 벌여놓고 수습 못하기 일쑤인 넷째라든지, 그런 사람이 있나보다. 명절에는 그 빈자리를 숨길 수 없다.

한국 남자들은 명절에 무엇을 하고 노나? 국민 오락이라고 하는 고스톱이다. 추석상을 차리고 치우느라 지친 여자들은 술상을 봐주고 이제 쉬려는 참인데, 노인요양병원에서 하루 외박 나온 노모가 모처럼의 아들들 곁을 지키다가 실수를 한다. ‘딸도 못 낳은 노모’라는 말에는 늙으면 아들이 열이라도 딸 하나만 못하다는, 아들로서의 자책감과 아들 못 낳았다는 말은 흉이 되지만 딸 못 낳았다는 말은 농담이 되는 통념이 배어 있다.

만사 시름을 잊게 하는 고스톱이다. 형제라고 봐주지 않고 열을 올리면서도 화자의 의식 한끝에는 고스톱 패마다 인생 면면이 어른거린다. ‘허투루 버리는 피도 없는데, 목구멍을 거슬러 오르는 숨결이 꼴깍꼴깍’ 거친 나날…. 저마다 아등바등 사는 형제들이며, 삶이 희미해지는 노모며, 생각하면 마음이 소슬해지는 화자다. 베란다 창에도 화투짝에도 공산명월 휘영청 비추는 서민들의 추석날 밤.

황인숙 시인
#고스톱#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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