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3>경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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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이영광(1965∼ )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발레의 기본동작 중 하나인 파세(passe)를 하고 있는 듯 우아하게 외다리로 선 모습이 특징처럼 떠오르는 황새. 문득 황새가 왜 외다리로 서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두 발을 다 들면 자빠지기 때문’은 웃자고 한 답이고, ‘대개 오래 서 있을 때에 체온이 땅으로 빠져나가는 걸 반으로 줄이기 위해서’가 정답일 테다. 과학 상식이 어떻든 외다리로 서 있는 황새는 고고하고 초연해 보인다.

해질녘, 물이 차 있는 논에 황새가 외다리로 서 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외다리로 선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찾지 못했다는 것일까/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없다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날이 컴컴해져 외다리는커녕 황새도 안 보이자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평생의 경계’를 본다. 시에서 외다리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 두 상반된 세계를 이어주는 점이(漸移) 지점이다. 중학생 때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딘지 고결하게 느껴졌던 건 그분 성품이 닿은 거지만 한쪽 다리를 저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두 다리 동물이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딛고 있지 않을 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면서 비세속적 세계로 한 발 이끈다. 시인 이영광의 세밀한 자화상을 보는 듯한 시.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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