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2>아욱국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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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국
―김선우(1970∼ )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
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
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그 손이 짚어준 저녁의 이마에
가난과 슬픔의 신열이 있었다면
그보다 더 멀리 간 뻘밭까지를 들쳐 업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푸르른 관능의 힘,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
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
아욱국 끓이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시작부터 ‘아욱을 퍽퍽 치대어 빠는’ 화자의 암팡진 힘과 동작이 독자의 팔뚝에 불끈 전해진다.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엄마한테 못하는 말이 없는 딸이다. ‘오, 가슴이 뭐냐?’ 엄마의 순진한 반문에 발칙한 딸은 ‘가슴이 활짝’ 벌어진단다. 아욱을 빨던 화자가 몸을 뒤로 젖히며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모녀의 돈독한 정과 화자의 당돌하고 화끈한 성격이 배어나는 정경이다. 김선우는 여성의 몸과 생리를 파고들어 감각적인 시구로 길어내는 데 일가를 이뤘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에서 화자는 제 몸, 뭇 여성의 몸, 생식(生殖)하는 몸의 동물적인 어떤 현상, 현장을 유추한다. 그 유추에 선병질적으로 오직 징그러움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화자는 싱싱한 성, 경이로운 관능을 느낀다. 쇄말적 관능이 아니라 생명의 질펀한 원천인 관능.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이리 그윽한 잠언에 이르는 시구들이 자분자분,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일 줄 아는 시인 김선우.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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