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9>얼룩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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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이사라(1953∼)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화자도 슬프고 화자가 사랑했던 이도 슬프다. 총체적으로 슬픔이 많은 시다. ‘내가 울면/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구구절절 슬프다. 슬퍼하는 사람의 눈물의 얼룩,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랑의 역사’의 아른거리는 무늬가 된다.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화자가 밤이고 상대가 별인가. 실제로는 별은 가만히 있고 밤이 떠나는 건데, 슬쩍 뒤틀어 독자의 감성을 미묘하게 건드린다. ‘어느 날/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시에 풍성한 맛을 주는 ‘문명’이라는 단어! 화자는 모든 문명 속의 벽화들을 제 사랑의 역사의 배경으로 만들어버린다. 화자가 벽을 바라보면 거기 언제까지나 당신의 모습이 있다. 모셔진 이의 현세에서의 삶과 미래의 영생을 그린 이집트 피라미드 속의 벽화처럼, 알타미라 벽화처럼! 이 지독한 그리움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

슬픈 사랑의 노래를 오케스트라로 아름답고 장중하게 연주했다. 자기를 놓지 않고 의연히 상상력을 펼치는 품위가 돋보인다. 뼛속 깊이 육화된, 성숙한 사랑!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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