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패션 외교’보다 중요한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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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역대 대통령의 다자(多者) 정상외교 마무리 기자회견 때 진심으로 “리어얼∼리(really)?”라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폐막 후 이명박(MB) 대통령의 청와대가 회의 성과를 브리핑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의장국 한국이 세계경제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경제의 새 규범과 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한국은 글로벌 선도국가로서의 지적 리더십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G20 회의를 성공적으로 주최했다는 자부심에 들뜬 MB 청와대 핵심 당국자들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세계 언론은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정상의 발언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움직임에 주목했지 한국 대통령의 영향력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단군 이래 최대 정상행사’였던 2012년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직후 청와대는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 정치적 선언 단계에 있던 회의를 실천의 단계로 진전시켰다”며 으쓱해했다. 하지만 핵과 방사능 테러 방지를 위한 포괄적 실천조치를 담고 있다는 ‘서울 코뮈니케’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MB 치적에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니다. 성과 부풀리기가 오히려 일반 국민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선진국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게임의 법칙을 따르던 나라가 ‘규칙을 만드는 나라’의 일원으로서 정상회의를 주최했다는 정도만 해도 충분한 감동인데….

세계인에게 ‘더 큰 대한민국’을 각인시키는 데 다자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내각에 빈자리가 숭숭 눈에 띄고 국회는 절름발이 신세인데 대통령이 허구한 날 밖으로만 돈다고 비판할 일이 아니다. “외국에 가면 대접 잘 받는다”며 ‘힐링’ 차원에서 해외 순방길에 오르던 시절은 한참 지났다.

10월은 지난달 G20 정상회의에서 다자무대에 데뷔한 박근혜 대통령이 본격적인 ‘외교의 맛’을 느끼게 될 중요한 한 달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동아시아정상회의(EAS)로 이어지는 바쁜 일정이다.

이번 회의의 주무대인 동남아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앞마당’에 가깝고, 정치적으로는 중국이 영향력을 무한 확장하고 있는 곳이다. 동시에 동남아는 중국에 이은 제2위(1310억 달러) 교역대상이자,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지역(연간 430만 명)이다.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을 뒷짐 지고 구경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박 대통령이 ‘아시아의 미래’라는 틀을 제시해야 한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 양쪽 모두에서 성공한 ‘스토리’는 동남아에도 충분한 흥행요소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퇴장으로 공석이 된 아시아 지도자의 탄생을 바라는 분위기도 있다.

정상외교 뒤 박 대통령의 패션 외교에 전 세계가 반했다느니, 수준급 외국어 구사력이 호평을 받았다는 식의 포장은 없었으면 좋겠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 ‘세일즈 외교’가 빛을 발했다는 상찬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문제를 서로의 눈높이에서 같이 고민하고 지혜를 보태려는 진지한 모습만 보여줘도 평가는 저절로 따라온다. 그 과정은 지루할 만큼 반복적이어야 하며 미래의 한국 지도자도 일관성 있게 그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정상외교는 임기가 있는 대통령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치밀하게 추진해야 할 대계(大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박근혜 대통령#외교#아시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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