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종이를 태우지 못하는 돋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9일 21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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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창출에 다 걸자’는 대통령… 알맹이 없는 대책 내놓는 정부
기득권 보호에 매달리는 정치권… 의지-행동력 없는 관료들 한심
대통령의 가장 큰 승부처는 정상회담이 아닌 일자리 전쟁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새 정부의 모든 목표는 좋은 일자리 창출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비도 늘어나고 투자가 되고 경기활성화가 되며 우리가 목표로 하는 중산층 70%, 고용률 70%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 창출이 안 되면 이도저도 다 안 되게 됩니다. 모든 부처가 일자리 창출에 우선순위를 두고 거기에 집중하는 노력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한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그 누구도 일자리 만들기를 강조하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다. 재임 중 노무현 대통령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박 대통령은 비유도 근사하게 한다. “목표를 많이 두게 되면 혼선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돋보기로 종이를 태울 때도 초점이 맞춰져야 태울 수 있는 것이지, 초점이 흐트러지면 종이를 태울 수 없습니다.”

제1야당 민주당의 김한길 대표는 “민주당이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지향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라고 국민을 향해 말했다. 20대 30대 고학력 청년들이 배운 것을 써먹을 일자리가 없어 인생초반 낭인이 되는 상황, 여전히 기운이 펄펄한 중년들이 기업형 일자리가 없어 ‘까먹는 창업’으로 내몰리는 현실, 100세 시대에 끝없이 이어지는 무위도식 행렬…. 이 막막함에 답을 내지 않으면서 균등한 삶,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를 외치는 것이 공당(公黨)의 민생정치일 수는 없다.

지난주 정부가 서비스산업 대책을 낸다기에 ‘초점을 맞춰 종이를 태우는 돋보기’ 같은 일자리 대책을 기대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서 바비큐를 해먹을 수 있다’로 풀이된 도시공원 취사(炊事) 일부 허용이 ‘전에 없던 대책’으로 꼽히는 걸 보고 눈을 감고 싶었다. 뜨물로 죽 쑤는 것 같은 이런 대책은 대통령 메시지의 무게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다. 해답 없는 대책이 반복되면 ‘개혁의지 없는 무능정부’의 딱지만 선명해질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번 대책에서 제외된 대형과제들은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인데, 그동안의 경험상 국회에 가는 순간 논란만 커지고 안 될 것이 뻔해 일단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책부터 마련했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대책에서 아예 제외한 대형과제들이란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약국법인, 선진국 사립학교, 카지노 등 의료·교육·관광산업의 규제 및 진입장벽 해소를 뜻한다. 정부는 “미진한 분야는 계속 추진하겠다”고 덧붙였지만 정권 초기에 못하는 ‘계속 추진’은 ‘계속 보류’와 상통한다.

이 부문들의 투자 허용과 시장 창출은 좋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사립학교 대외개방은 해외 유학 수요를 완화해 달러 유출을 크게 줄이는 효과도 낳는다. 의료관광 촉진은 외화 획득과 내수 촉진의 효자가 된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미비한 의료관광 진흥 법규를 서둘러 정비하기는커녕 규제를 온존시키기에 바쁘다. 의료관광객을 태국 싱가포르 등에 빼앗기는 만큼 좋은 일자리도 달아난다.

서비스분야의 기득권 보호(진입 규제)는 신규 일자리를 수만 개, 수십만 개 잡아먹는다. 정부와 정당들이 이런 규제를 풀지 않으면서 청년실업 해소를 말하는 것은, 현실이 아닌 구호로 국민에게 최면을 걸려는 것과 같다. 대통령과 정책결정 관료들, 그리고 여야당 국회의원들은 높은 지위에 좋은 일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자식의 일자리 걱정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말과는 달리 ‘일자리 한 개의 절실함’을 서민들처럼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정부는 ‘돋보기도 초점을 맞춰야 종이를 태울 수 있다’는 대통령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 공허한 대책이라면 더는 내놓지 말라.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법제도의 규제 사슬, 왜곡된 이념과 정서 같은 현실의 장벽들을 타개할 의지도 지혜도 행동력도 없다면 말로써 국민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지 말라.

정부와 여당은 일자리 창출에 대한 국민의 공감을 결집하고 기득권층을 설득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해봤는가. 어차피 해봐야 안 된다고? 그처럼 무기력하게 포기하면서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것인가. 일자리가 없는데 무슨 행복인가. 일자리를 죽이는 규제의 이익은 누구누구가 나누어 챙기는가.

정부의 모든 목표는 좋은 일자리 창출에 두어야 한다는 믿음이 확고하다면 박 대통령부터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고질적 규제의 철폐에 앞장설 일이요, 때이다. 대통령의 가장 큰 승부처는 정상회담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다. 대안 없이 10대 20대의 절망을 말로 힐링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정치권도, 기득권 집단도 내 자식 내 손자가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 한국을 위해 대승적 협조를 해야 옳다. 새로운 서비스 시장과 잠재적 일자리가 사라지면 그 최대 피해자는 미취업 세대이다. 아들딸 손자손녀들을 더는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근로의 권리(헌법 32조)를 확대할 방도가 있음에도 거꾸로 발목 잡는 것이야말로 반(反)경제민주화이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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