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던 할아버지가 나무에 붙은 매미를 발견하고 손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리치며 말했다.
“얘야, 이리 와 나무에 붙은 이 멋진 매미를 봐라!”
손자가 다가와서 매미를 봤다. 할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얘야,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꼼짝도 않고 있니!”
그러자 손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마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그럴 거예요.”
일본에서 전해지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 탁광일 박사(59)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생태학자다. 1999∼2003년 온대우림과 생태계를 연구하는 현장 실습학교인 캐나다 뱀필드센터의 유일한 동양인 교수로 재직해 그의 이야기가 해외 한국인의 활약상을 그린 방송 ‘한민족리포트’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은 밴쿠버 섬에서 체험 중심의 환경 교육을 하는 네이처워크스 에듀케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탁 박사가 하는 체험 중심의 환경 교육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있는 그대로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체험 코스 중에는 밴쿠버 섬 서쪽에 있는 누카라는 작은 섬이 있다. 침엽수로 이뤄진 누카 섬의 해안 온대우림은 공룡시대 이전 지구의 생태계와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이 섬을 일주하는 데 5, 6일쯤 걸린다. 왼쪽엔 원시의 숲, 오른쪽엔 원시 바다를 끼고 걷는 누카 섬 하이킹에 대해 그는 “전혀 다른 두 생태계인 숲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는 모습은 마치 남녀가 만나 한 몸이 된 것 같다”고 표현한다. 길에는 흑곰 배설물이 널려 있고 바닷가에는 사슴, 늑대, 밍크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다. 운이 좋으면 불과 수십 m 앞에서 사슴, 늑대와 마주치기도 한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지만 공포와 환희의 전율이 온몸에 흐른다. 평생 포장된 길만 걸어 다닌 도시인들에게 이 전율을 맛보게 해주고 싶지만 사람들은 섬에 들어온 지 이틀만 지나도 지루해한다. 그리고 묻는다. “쇼핑은 언제 하나요?”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 머물며 컴퓨터 같은 정보기술(IT) 기기와 연결된 채 가상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연 불감증에 걸리기 쉽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발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아동교육 전문가 리처드 루브는 이 같은 현상을 ‘자연결핍 증후군’이라고 명명했다. 자연결핍증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을 불결하고 위험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성인이 돼 자연 파괴나 무차별적 개발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오랜 시간 공들여 찍은 자연 다큐멘터리에 감동하고 ‘야생 예능’ ‘리얼 버라이어티’를 앞세운 예능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도 결핍 증세의 하나일 수 있다. 결핍은 충족을 원한다. 하지만 편안한 거실 소파에 앉아 TV 속의 ‘편집된 야생’을 감상하며 자연결핍증을 치유하는 것은, 영양 결핍을 걱정하며 매일 합성 비타민을 챙겨 먹는 것과 같다. 더욱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리얼 야생’이 알고 보니 각본 있는 드라마였고 오지 탐험은 관광 체험 상품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가짜 약을 먹으며 결핍이 치유됐다고 믿어온 셈이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보면 무한한 우주 속에서 지구와 나 자신의 존재가 새롭게 느껴지면서 가슴은 떨리고 팔뚝에는 굵은 소름이 돋아나는 것. 탁 박사는 이것이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의 신체가 일으키는 생리적 반응이라고 말한다. 봄이다. TV 속에서 더 자극적이고 더 생생한 ‘리얼 야생’을 찾는 대신에 겨우내 뜨뜻한 방바닥과 붙박이가 돼버린 엉덩이를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가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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