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대변(代辯)인 vs 대독(代讀)인

  • 동아일보

박성원 정치부장
박성원 정치부장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008년 4월 18일 미국 워싱턴. 이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관계자는 승전보를 알리듯 환한 표정으로 ‘드디어 쇠고기 실무협상이 타결됐다’고 소식을 전했다.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청와대 관계자들은 마치 잔칫집 식구 같았다. 하지만 기쁨은 곧 근심으로 바뀌었다. 광우병 발병 가능성의 과학적 근거와는 관계없이 정부가 국민의 건강권을 무시하고 일방적 협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타결해 버렸다는 인터넷의 공격이 축산농가 시위로, 광화문 촛불시위로 번져 나가는 데는 2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민 공감 얻어낼 기회 날려

531만 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로 집권한 이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만에 고개 숙여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하고 국정운영 지지율이 한때 10% 중반대까지 떨어졌던 쇠고기 사태의 출발은 ‘불통(不通)’이 화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우병 선동세력이 내세웠던 주장들의 근거 없음이 하나둘씩 드러났지만 한미동맹 복원이라는 목표에 매몰돼 쇠고기 협상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과정을 생략했던 효율제일주의는 임기 초반 국정 장악력 약화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5년 전 얘기를 끄집어내는 건 지금 다시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불통’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리기 때문이다.

진앙은 언론인 시절 국민의 알 권리를 누구보다 강조했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여야 정치권을 난타했던 윤창중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이다. 그는 인수위 첫 인선 발표장에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나와 “저도 처음 본다”며 명단만 달랑 발표하고 인사 배경을 한마디도 설명하지 못하는 민망한 모습을 보였다. 혼선과 오보를 막기 위해서라며 업무보고 내용 ‘NO 브리핑’을 천명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운 대목에선 후배 언론인들과 그들을 통해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국민을 혹시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기자들의 반발에 밀려 하루 만에 브리핑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자칭 ‘인수위 단독 기자’라는 윤 대변인은 업무보고 목록을 읽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로 업무보고 일정을 마친다. 새 정부의 정책방향을 국민에게 알리고 공감과 이해를 구해 정책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던 인수위 업무보고가 이렇게 허탈하게 막을 내리고 있다.

미 스탠퍼드대 더글러스 리버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통령의 지지율이 1% 올라갈수록 의회에서 대통령이 내놓은 법안이 통과될 확률도 1%씩 높아진다고 한다. 양극화 해소와 성장동력 회복을 위해 때로는 국민의 고통 감내를 요구하는 쓴 약도 내놔야 할 ‘박근혜 대통령’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와 설득을 구할 대변인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밀봉된 쪽지를 꺼내 대신 읽는 역할만 할 사람이라면 ‘대독(代讀)인’이지 ‘대변(代辯)인’은 아닐 것이다. 후보자를 수시로 지근거리에서 만나 생각을 교감하고, 밖에서 들은 여론을 가감 없이 전하는 입과 귀 역할을 할 수하를 갖지 못한 지도자라면 쌍방향의 ‘2.0 정부’를 넘어 개인별 맞춤행복을 지향하는 ‘3.0 정부’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나를 따르라’ 강요만 할건가

이제 첫 걸음마를 떼는 ‘박근혜 정부’의 입을 바라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접시 깨는 것이 두려워 접시 닦는 것 자체를 주저하는 주방장처럼, 혼선이 두려워 입을 재봉질당한 대변인 체제를 운영할 것인가. 정부가 결론을 내지 않은 검토 단계의 사안을 국민이 알게 되면 혼란이 오기 때문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결론을 낸 뒤 국민에게 ‘나를 따르시오’라고 요구하는 일사불란한 국정운영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

박성원 정치부장 swpark@donga.com
#이명박#부시#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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