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종구]D-9, 아름다운 패배도 준비할 시간

  • 동아일보

윤종구 정치부 차장
윤종구 정치부 차장
국회의원 선거 중대선거구제 전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임기 내 개헌,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 선출직과 고위공직자 병역사항 인터넷 공개, 암과 난치병 진료비 총액상한제 도입….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공약(公約)이다. 지켜진 게 없다.

권력형 비리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상설화법 추진, 공직자 뇌물 수수액의 50배 벌금형 부과, 연간 7% 경제성장률로 5년간 일자리 300만 개 창출, 서민 주요 생활비 30% 감축, 청년실업 절반 축소….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공약이다. 역시 지켜진 게 없다.

이런 공약들이 다 실현됐다면 올해 대선에 나온 후보들이 굳이 새 공약을 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는 이미 ‘온 국민이 행복한 나라’, ‘사람 사는 세상’이 됐을 것이다.

왜 이렇게 좋은 공약들이 안 지켜질까. 재원 조달을 고려하지 않은 장밋빛 ‘공약(空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당 및 반대세력의 극렬한 저항도 주요 원인이다. 노무현 정부 때의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 때의 민주당은 한결같이 집권당의 대통령 공약사업을 결사반대해 상당 부분 좌절시켰다.

패자는 5년 내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소수당이면서도 단상 점거, 출입문 봉쇄 등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집권당 공약사업을 저지했다.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아 승자가 된 대통령과 집권당이 오히려 패자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 이런 경우는 없다.

지금 ‘빅2’ 대선후보들의 공약을 이행하려면 5년간 135조 원(박근혜) 또는 192조 원(문재인)이란 천문학적 금액이 필요하다. 4인 가족 기준으로 가구당 평균 1080만 원 또는 1536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호주머니 걱정을 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왜? 어차피 안 될 줄 알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우리 국민들은 이미 ‘공약(空約) 면역증’에 걸려버렸다.

이럴 거면 선거는 왜 하나. 행정수도 이전과 4대강 사업이 싫더라도 다수 국민이 표로 지지했으면 패자는 이를 존중했어야 한다. 그걸 막는 것은 국민을 이기려는 것이다.

다음 주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승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패자의 선택이다. 아름다운 승복을 할 것인가, 끝없이 발목을 잡을 것인가.

일본 고시엔(甲子園) 전국고교야구대회 얘기를 해주고 싶다. 경기가 끝나면 양 팀 선수들은 홈에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인사를 나눈다. 고개를 더 깊이 숙이는 쪽은 주로 이긴 팀이다. 그리고 이긴 팀은 외야를 바라보며 홈 앞에, 진 팀은 3루 쪽 더그아웃 앞에 일렬로 선다. 이긴 팀 선수들이 목이 터져라 교가를 부르는 모습을 진 팀 선수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끝까지 경청한다. 눈물범벅이 된 패전투수가 승리투수에게 악수를 건네면, 승리투수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위로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승자는 패자를 배려하고 패자는 승자를 존중한다.

자리를 뜨지 않고 부동자세로 승자의 자축을 지켜보는 일은 패자에겐 잔인한 시간이다. 그러나 스포츠든 정치든 그런 잔인함을 딛고 전진한다. 어린아이들 소꿉장난에서부터 대통령선거까지 공통점이 있다면, 승부에 참가한다는 것은 승리의 영광뿐만 아니라 패배의 잔인함을 견딜 각오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선거가 9일 남았다. 오직 승리만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빅2 후보들이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만약의 경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패자로 남을 것인지도 고민해 봤으면 한다. 19일 밤 패자가 승자에게 축하 전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추운 날씨에도 투표장까지 가서 표를 던진 수천만 국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윤종구 정치부 차장 jkmas@donga.com
#대선#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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