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용하]복지 늘려가되 경제민주화 신중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6일 03시 00분


김용하 객원논설위원·순천향대 교수
김용하 객원논설위원·순천향대 교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선 예비후보자들의 10대 대선공약을 공개했다. 얼핏 제목만 봐서는 어느 후보 공약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항상 사용하는 레토릭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추정할 따름이다. 이렇게 선거공약이 비슷하다면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돼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대부분 공약들은 5년 전, 10년 전 대선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이번에 눈에 띄게 다른 것이 있다면 경제민주화 공약이다. 새로운 공약인데도 세 후보의 공약이 소프라노 안철수, 테너 문재인, 알토 박근혜로 구성된 혼성 3부 중창단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과 같이 한목소리가 돼 나온다. 박근혜 후보는 기업의 정당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해야 하지만 대주주가 사익을 추구하거나 대기업이 시장 지배력을 남용하는 일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재인 후보는 누구에게도 특권과 반칙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불법과 반칙을 하면 그로부터 얻는 부당이익보다 더 큰 불이익과 벌이 주어지도록 하겠다고 강조한다. 안철수 후보는 재벌 외부와 내부의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되, 재벌 확장과 이에 따른 시장 왜곡을 바로잡는 데 집중하겠다고 공약한다. 세 후보가 음의 높낮이와 음색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거의 같은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서로 닮은 재벌 때리기 선거공약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선거공약의 대동소이한 차이에 비해 시민단체나 전문가들의 입장은 크게 대립하고 있다. 실효성 있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제시하라는 주장과 경제민주화 공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측이 강하게 부딪치고 있다. 대선 이후에도 격렬한 정치 경제적 갈등이 예고된다. 이 시점에서 의문시되는 것은 경제민주화 논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얼마나 의미 있는 공약인가 하는 점이다.

경제민주화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생 환경인가 아니면 재벌 해체인가. 공약만 봐서는 세 후보의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경제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측은 배후에 재벌 해체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제시되고 있는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 제한, 계열분리 명령 등 세 후보의 공약을 제대로만 입법하면 우리나라의 재벌은 어렵지 않게 분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재벌이 없어지면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책임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제로섬 무한경쟁 상태로 진입하고 있다. 성장이 지체되는 가운데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혈투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은 얼마나 될까. 대기업이 벌어들인 잉여가치가 모든 국민에게 고르게 순환되지 않는다고 해서 대기업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는 아무래도 궁색하다.

최근 세계적인 휴대전화 기업인 노키아가 흔들려 핀란드 경제 전체가 힘들어지면서 노키아 같은 대기업에 의존하는 국가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노키아 휴대전화의 부품 대부분이 중소기업에서 납품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도 첸나이에 현대자동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도 함께 있듯이 대기업이 잘 돌아가야 중소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은 수출 의존, 대기업 중심, 정부 주도의 성장모델을 가지고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내수 중심의 자급자족 모형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이미 폐기됐고, 중소기업 중심 모형은 대만 모형으로 한때 성가를 올렸으나 한계를 드러냈다. 분배 혹은 양극화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한국의 성장모형 자체를 폐기하자는 경제민주화 논의는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수출과 규모의 경제로 발생한 잉여가치가 경제 전체로 순환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시정돼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선진국들이 복지국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자유시장 경제에서 원활하지 않는 분배의 흐름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생산의 흐름 못지않게 분배의 흐름이 효율적이어야 지속가능한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

대만식 중소기업 중심모형의 한계

경제민주화 논의가 활성화한 시점이 자유시장을 맹목적으로 주창하는 사람들이 복지의 필요성을 거세게 부정하면서 시작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복지’라는 분배의 흐름으로 충분히 잘 흐르게 할 수 있는 민심의 강물을 대책 없이 조잡한 둑으로 막으려다 경제민주화라는 급류에 대한민국호가 전복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기득권층도 복지와 경제민주화 둘 중 하나는 양보해야 할 때가 왔다. 대선후보들은 온 국민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국가비전을 복지라는 붓으로 그려내야 한다. 경제민주화 논의는 그리던 그림을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종이와 물감이 돼야 할 것이다.

김용하 객원논설위원·순천향대 교수 yongha01@sch.ac.kr
#복지#경제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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