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유화진]‘우유 주사’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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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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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진 변호사·여성의사 출신 1호 판사 전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유화진 변호사·여성의사 출신 1호 판사 전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2009년 여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영원히 잠들게 했던 ‘프로포폴’이 강남의 한 산부인과 의사의 시신 유기 사건으로 2012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프로포폴은 하얀색을 띠는 액체여서 일명 ‘우유 주사’, 흔히 수면 마취제라 불리며, 정맥주사의 형태로 사용되는 마취제의 한 종류다. 임상에서는 큰 수술에 수반되는 전신마취 유도 및 유지, 중환자 진정, 전신마취가 필요 없는 작은 수술이나 수면내시경 검사 등에서 진정 작용을 위해 사용한다.

프로포폴은 주입 즉시 체내에 빠르게 퍼져 바로 효과가 나타나고, 주입을 중단하면 마취에서 신속히 회복되는 장점이 있다. 케타민이나 미다졸람 같은 유사 효능 약물은 환자가 마취에서 깰 때 악몽을 꾼 듯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주입을 중단해도 마취 효과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불편이 있지만 프로포폴은 그런 단점이 별로 없어 아주 많이 사용되는 마취제 중 하나다.

프로포폴은 심지어 환자가 깨어날 때 기분 좋은 느낌까지 받는다. 술을 마셨을 때처럼 고양된 느낌을 받아 환각 효과를 경험할 수 있고, 불면증 환자는 숙면을 취한 것처럼 개운하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고 한다. 이런 효과 때문에 오남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하지만 반복된 투약과 용량의 증가는 정신적, 신체적 위험으로 직결된다. 호흡기계 이상으로 인한 호흡 정지, 심장기능 저하, 저혈압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사망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약물에 대한 정신적 의존성은 개인의 일상을 파괴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오남용의 당사자가 일반인보다 프로포폴을 접하기 쉬운 병원 의료진이라는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2000∼2011년 프로포폴 관련 사망자는 36명인데 이 중엔 의사나 간호사 등 병원 관계자가 다수였다. 프로포폴을 관리하고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료진이 오히려 오남용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누구든지 프로포폴의 유혹에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다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는 프로포폴이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환각제 대용으로 오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 최초로 2011년 2월부터 향정신성의약품(마약류)으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의료기관 등은 프로포폴 사용량, 재고량 등을 철저히 기재해야 하며, 사용 후 남은 분량은 폐기해야 하는 등 엄격한 규정을 지켜야 한다. 정부도 수시로 합동단속을 실시해 도매업체나 의료기관의 위법행위를 발표하고, 행정처분을 하고 있다. 적발되는 의료인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 수위에 따라 자격정지 혹은 자격취소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엄격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프로포폴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마음먹기에 따라 장부 기재는 작성하기 나름일 수 있고, 잔량은 폐기하지 않고 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산부인과 의사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규정과 단속의 사각지대를 보여 준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여러 종류의 약물을 마치 칵테일처럼 만들어서 주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규제를 해도 이를 비켜 갈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며, 왜곡된 방식, 더 위험한 형태로 나타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현재의 법규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관리를 유지하되, 마약류 오남용을 불러오는 근본적인 원인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마약류 오남용 실태, 그 피해 등에 대한 정확한 자료와 통계를 확보해야 한다.

단속과 제재가 필요한 경우는 엄히 집행하되, 단속과 제재 일변도가 아닌 마약류 오남용자를 위한 치료와 재활 시스템의 구축, 이를 운용할 전문가의 양성, 의료 관계자나 마약류 취급자의 교육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은 기본이다.

유화진 변호사·여성의사 출신 1호 판사 전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우유 주사#프로포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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