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교과서를 처음 집필해 출간하고 난 뒤 학생들에게 그 책을 수업교재로 사용하겠다고 공고한 적이 있었다. 첫 수업 시간에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맨 앞줄에 앉은 몇몇 학생이 신간 교재를 전권 복사한 후 표지까지 붙여서 제본한 책을 펴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 앞에서 불법 복제판을 펴놓고 있는 셈이었다.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수업을 하면서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교재를 살 돈이 부족해 복사를 한 것이겠지’ 하는 이해심과 ‘지식재산권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자세와 문화’를 가르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결국 전자가 승리했다. 물론 ‘돈만 아는 탐욕스러운 교수’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말이다.
서비스 산업에는 지식재산권 등과 연결된 고급 서비스부터 단순한 서비스까지 다양한 분야가 포함된다. 우리 경제에서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 가면 가끔 “이거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라는 말을 듣는다.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얘기이니 손님으로서는 반가울 따름이다. 그런데 단어가 흥미롭다. ‘공짜’로 드린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공짜’ 대신 ‘서비스’로 드린다고 표현을 한다.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재화(goods)와 용역(services)은 소비의 대상으로서 매우 가치가 있는 실체이다. 이처럼 가치가 높은 ‘서비스’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공짜’라는 단어와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수업 중 저자 앞에 놓인 불법복제물
과거 영어로 된 외국 교재, 즉 ‘원서(原書)’들의 복사본이 대형 서점에서도 버젓이 서가에 꽂힌 채 팔렸고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불법 복제가 일반화됐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생활해보니 완전히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학생이 소프트웨어를 살 때 정품을 구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교재의 경우도 복사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서의 일부만 복사하는 경우에도 복사 시설을 운영하는 업체에서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손을 거치는 각종 서비스에 대해 따로 보상을 하는 문화도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에게 음식값 이외에 팁을 지불한다든지, 택시를 타는 경우에도 요금 이외에 따로 일정 부분 팁을 주는 관행이 정립돼 있었다. 처음에는 귀찮게 느껴졌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복잡하든 단순하든 여러 가지 무형의 ‘서비스’에 대해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을 해주는 문화가 잘 정착돼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매킨지 같은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나 각종 소프트웨어 및 문화산업들이 미국을 기반으로 성장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지식재산권 등 무형의 서비스에 대한 엄격한 관리와 제대로 된 보상을 하는 문화가 관련 산업 부흥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토종’ 컨설팅 업체를 꼽기가 어려운 것도 이해가 간다. ‘서비스’가 ‘공짜’라는 단어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서비스’ 산업은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계약서나 보고서를 페이지 수로 평가하려 들고 소프트웨어나 각종 음원(音源) 내지는 영화까지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은행의 각종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은행이 현금자동인출기를 운영하는 데 사람은 안 보이고 기계만으로 ‘자동’ 처리가 되는데 왜 수수료는 이리 비싸냐는 식의 지적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인식 전환이 산업 부흥의 원동력
한국이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 은행 직원이 계좌 자동이체를 해주면 내가 그 직원 급여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도 필요하다. ‘현금자동인출기’가 ‘자동’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계 설치비와 기계가 위치한 장소에 대한 임차료, 그리고 기계를 관리하는 수많은 직원의 임금이 지급되므로 일정한 이용 수수료를 기꺼이 지불하는 자세도 요구된다. 음식 한 접시가 ‘공짜’로 제공이 되더라도 그 음식을 가져온 종업원의 ‘서비스’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서비스’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눈에 안 보이는 무형의 ‘서비스’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고 정착돼야 한다. ‘서비스’가 제대로 대접받는 풍토가 조성됨으로써 금융 회계 법률 보건 의료 등을 포함한 각종 ‘서비스’ 산업이 우리 경제에서 더욱 눈부신 성장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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