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민주당, 김대중-노무현 밟고 反美 反안보 모험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10일 03시 00분


2003년 2월 15일 김대중(DJ) 대통령이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FTA)인 칠레와의 FTA를 체결할 때까지 우리나라는 FTA 황무지였다. 세계적으로 체결된 FTA가 170개가 넘었으나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중 FTA가 한 개도 없는 나라는 중국을 빼면 한국이 유일했다. DJ는 FTA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통상교섭본부를 만들었으며 결국 임기 내 한-칠레 FTA 타결에 성공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취임 첫해인 2003년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대 진입을 위해 FTA를 적극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노 정부 때 싱가포르,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4국, 아세안 10국과의 FTA는 발효까지 끝냈다. 이명박 정부가 마무리한 인도, 유럽연합(EU), 미국과의 FTA 협상도 모두 노 대통령 때 시작됐다.

민주통합당이 올해 대선에서 집권하면 한미 FTA를 폐기하겠다는 공개서한을 그제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냈다. 민주당은 ‘포괄적 재협상이 관철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미국 측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여서 사실상 폐기 통보나 같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재협상 10개 항목 중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등 9개가 2007년 노 정부 당시 타결된 내용 거의 그대로다. 이래놓고 DJ와 노 대통령을 계승한 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DJ와 盧는 FTA 강국 실현에 國運 걸었다

2007년 1월 노 대통령은 “진보개혁 세력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세력이 되려면 개방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대세를 수용해야 역사의 주류 세력이 될 수 있다”며 FTA 비판론자들을 일깨웠다. DJ는 그해 3월 CBS TV 인터뷰에서 “한-칠레 FTA 때 농민들이 타격받는다고 반대가 심했지만 실제 해보니 큰 피해가 없었다”며 “미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우리에게) 넘기니까 안보가 소홀해진다고 하는데 한미 FTA는 (미국을) 경제로 묶어줘 안보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한미 FTA는 단순한 경제협정을 넘어 ‘경제적 안보동맹’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만일 좌파정권이 들어서 한미 FTA를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면 이는 자동차 몇 대 덜 파는 정도가 아니라 한미 안보동맹을 뒤흔드는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두 나라 정부가 합법적 절차를 거쳐 비준한 국제적 협약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폐기하는 나라를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가 신뢰할 리 없다. 바로 이런 외교 안보적 의미 때문에 반미(反美)주의자들이 한미 FTA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아예 한미 FTA 폐기 카드를 ‘2012년 판 미선 효순 양 사건’으로 이용해 반미감정을 자극하고, 야권 결집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전술을 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여기에 ‘한미 FTA=서민경제 붕괴, 양극화 심화’ 도식 아래 이명박 정부에 대한 공격을 대선까지 이어가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전 세계 297개 FTA 가운데 한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된 FTA는 단 한 개도 없다. 우리나라도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외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한 적이 없다. 민주당 주장대로 한미 FTA를 폐기한다면 국가 위신과 대외신인도의 추락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미 FTA 폐기, 경쟁국 돕고 安保 불안까지 부채질

좌파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선진국이 과거 보호무역으로 부자 나라가 돼놓고서 후진국에 자유무역을 강요한다”고 비판한 책이 우리나라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장 교수는 한 단면만 보고 독자들을 잘못 이끌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국이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이룩한 고속압축성장은 미국이 동서 이념경쟁의 와중에서 모든 자유진영의 개도국들에 방대한 자국 시장을 일방적으로 개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산진영의 붕괴 이후 과거와 같은 ‘일방적으로 열린 해외시장’이라는 외생적(外生的) 호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미국은 철저히 상호주의 원칙에 따르는 시장개방을 추구하고 있다. 대외지향적인 한국 경제로서는 고립을 선택할 수도 없다. 한미 FTA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경쟁국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급격하게 높아지면서 우리의 대미 수출 및 투자 여건이 현저히 악화하는 상황에서 미국 시장에 보다 지속적이고 경쟁적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다.

노 정부 시절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도 “FTA를 죽이자는 건 노무현의 뜻이 아니다”며 “나야말로 진보의 집권을 원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질서를 당분간 유지될 세계적 흐름으로 인정하면서 전략적으로 개방하고, 개방했을 때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반미를 도구로 쓰는 정치공학으론 유권자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것을 민주당은 깨달아야 한다. 복지도 좋고 분배도 좋다. 그러나 한미 FTA까지 반대해서야 앞으로 대체 무얼 가지고 복지를 늘릴 것인가. 민주당이 수구좌파 노선을 고집해선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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