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 베를린을 5년 만에 방문했다. 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과 독일의 독한포럼(회장 하르트무트 코시크 독일 재무차관)이 공동 주최한 제10차 한독포럼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측 김학준 한독포럼 회장을 비롯한 양국 학자와 정관계 인사, 언론인 50여 명이 두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에 대해 이틀 동안 논의를 펼쳤다.
회의는 ‘제국의사당’과 부속 건물에서 열렸다. 제국의사당은 1894년 건립됐고 통일 후 연방정부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천도하면서 1999년부터 독일연방공화국 의회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의 원형지붕(돔)은 연방의회로 재개관하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투명 돔으로 바뀌었다. 2006년 월드컵 기간에는 의사당을 서너 겹으로 두른 긴 행렬 때문에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돔 꼭대기에 올라서자 의원들의 자리가 바로 아래 내려다보였다. 망원경이 있다면 의원들의 자료까지 읽을 수 있을 듯했다. 한국 국회의 ‘드잡이’가 이런 곳에서도 가능할까. 독일 연방의회를 한국에 옮겨온다면 폭력행위는 사진기자들의 카메라보다 국회 방문자들의 휴대전화에 먼저 잡혀 낱낱이 전파될 것이다.
역사학 박사인 의회도서관 연구원이 일행을 안내했다. 본회의장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의원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됩니까?” 통역이 “여기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 질문을 바꿔 보시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질문자는 “의원 보좌관이 의사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자는 갸웃하더니 “보좌관은 (본회의장 아닌) 사무실에서 업무를 도울 뿐”이라고 했다.
둘째 날, 슈테판 뮐러 연방의원 등 독일 측 참가자들은 독일의 정치재단이 정치 과정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인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 정치재단은 정당과 연계해 각종 현안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한다.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노사관계, 녹색당의 하인리히 뵐 재단은 환경 문제에 깊이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얘기를 들으며 올해 7월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정당 정책연구소 기사를 떠올렸다. 연구소마다 자신 있는 보고서 5개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하자 한 연구소는 공개할 만한 보고서가 없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 2, 3개씩 제출한 보고서도 현안을 요약한 10∼20쪽짜리에 그쳤다.
포럼은 양국 정상에게 전달하는 건의서를 채택하며 마무리됐다. 경제 분야에서는 양국이 보유한 재생에너지 분야 기술을 공유·교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화 분야에서는 학생과 문화전문가들의 상호 교환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현실 정책에 반영하기 앞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양국 협력에 대해 깊은 토의를 펼친 것만으로도 여러 생산적인 기회가 창출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포럼 참가자들은 18일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을 방문해 건의서를 전달했다.
숙소로 돌아온 뒤 컴퓨터를 켜고 동아닷컴 뉴스 사이트에 접속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야당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점거 속에 3주째 표류하고 있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곳에서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세계의 책임 있는 중강국(中强國·middle power)’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여러 가지를 논의했지만 독일과 한국은 아직 그만큼의 거리와 차이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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