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하기 겁난다. 그냥 들이민다. 성질들이 격해졌다. 눈 마주치면 왜 쳐다보느냐며 금방 주먹이 날아올 것 같다. 오가는 길 조금 비켜 갈 생각이 없다. 너 피해 가라며 어깨를 들이민다. 사람들 마음이 뒤틀어져 간다. 서로에게 실망한 얼굴이다. 적개심 어린 눈빛이다. 조금만 거슬려도 온갖 쌍스러운 욕을 봇물 터뜨리듯 쏟아낸다. 사람이 싫은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집단과 조직은 돈과 권력에 파묻혀 썩은 냄새를 뿜어낸다. 사정이 이러하니 반인륜적 범죄가 어지러이 춤 출 수밖에.
그런데도 먹고 입고 쓰는 돈 이야기, 무상복지 이야기, 차기 대권 이야기들로만 넘쳐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나. 이건 아니라고,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사람은 두 가지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것은 양식(糧食·food)과 양식(良識·good sense)이다. 糧食은 신체 활동을 위해 먹어야 할 것이고, 良識은 정신 활동을 위해 마음으로 먹어야 할 지성적 품성적 먹거리다. 糧食은 제철에 나는 음식들을 고루 먹으면 그것으로 건강한 몸을 보전하는 데 충분하다. 良識은 초중고 시절 다양한 교과목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 지식과 품성이면 일생의 밑거름으로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이 良識을 우리 청소년들은 편식한다. 입시와 교육과정 그리고 그 운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 탓은 아니다. 먼저 지성적인 덕(德) 교육의 경우 수학 영어 국어 순으로 많이 먹으라고 하고, 다른 교과는 별로 안 먹어도 된다고 한다. 집중이수제라 하여 어떤 교과목은 한꺼번에 다 먹어치우라고 하고, 도덕은 중학교까지만 먹으면 된다고 한다. 우리 삶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와 같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이를 제도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건만, 참으로 알 수 없다.
우리 청소년들은 사랑 절제 배려 등과 같은 품성적인 덕 교육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다. 이것은 태어난 후 생활 속에서 지속적 반복을 통해 습관이 됐을 때 가능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듯 한두 번 옳고 바른 일을 한다고 좋은 품성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품성의 습관화를 꾸준히 촉진하는 학교 교육프로그램 강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맛있는 김치는 싱싱한 배추를 소금에 절여 간이 밸 때까지 기다리고, 잘 버무린 양념과 담그는 사람의 정성어린 손맛이 보태질 때 나온다. 좋은 품성을 갖춘 인간도 이와 같다. 그들의 정신을 채워줄 좋은 내용으로 바르게 안내하면서 때로는 기다려주고 때로는 애정 어린 손길로 다독거릴 때 우리 아이들은 ‘맛있게’ 길러질 것이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부패로 물든 병리(病理)사회로 갈 것인지, 도리(道理)를 바탕으로 맛깔스러운 사람들로 넘치는 맛있는 사회로 갈 것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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