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전운(戰雲)은 사라졌다.” 1938년 9월 히틀러와 독일 뮌헨에서 협상한 후 귀국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런던 공항에서 단언한 말이다. 독일의 체코 병합을 눈감아 주는 대신에 히틀러로부터 더는 말썽을 안 피우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2차대전 부른 英美의 誤判
이 어설픈 평화 선언이 있은 후 정확히 1년 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35년 미국 의회는 중립법을 제정해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고무된 친(親)나치주의자들이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은 후에도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평화’를 외치며 대규모 시가행진을 하면서 국론을 분열시켰다. 이 같은 고립적 평화주의는 히틀러에게 유럽에서 도박을 벌여볼 만하다는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겐 철통같은 마지노선이 있다.” 프랑스의 무능한 육군 수뇌부가 히틀러의 위협 앞에서 프랑스 국민에게 호언했다. 거의 모든 병력을 마지노선에 배치해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지역방어의 참호전에 대비했다. 그러나 전쟁게임의 룰을 기동전으로 바꾼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이끄는 기갑 군단은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마지노선을 뚫어 개전(開戰) 1개월 만에 파리를 점령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세 나라의 이러한 엇박자가 히틀러의 야욕을 초기에 잠재우지 못해 유럽의 평화를 깼다. 역사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지 않으면 쓰라린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다. 세계 4위의 군사력으로 핵무장까지 해 강성대국을 외치는 북한을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2000년 우리 대통령도 평양에서 김정일과 협상해 평화를 얻고자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햇볕정책 10년에 주어진 것은 평화가 아니라 북핵 위협이다. 당연히 폐기처분돼야 할 친북평화주의인데 아이러니하게 천안함 폭침 이후 기사회생하고 있다. ‘정부의 강경정책이 북을 자극해 전쟁을 불러오므로 북한을 계속 달래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전쟁이냐 평화냐’의 신평화주의가 고개를 들고, 이것이 의외로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며칠 전에는 평창 겨울올림픽 남북공동개최 방안이 정치권에서 튀어나왔다. 분명 내년 선거에서 평화 메시지를 선점하려는 정치적 포석이다.
과거에는 중립법에 발이 묶인 미국이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평양에 대해 확고한 전쟁 억제력을 행사해야 할 중국이 북핵이나 천안함 폭침 등에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북한에 식량과 기름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평양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텐데, 무슨 꿍꿍이속인지 조중(朝中) 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동맹관계를 과시하며 동해의 나진항으로까지 자국 해군을 진출시키고 있다.
내년 선거 좌파 평화공세 경계를
진정한 강군(强軍)이란 적의 어떠한 기습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우리 군이 당했다. 군이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고 개혁을 해야 하지만 각 군 사이에 갈등이 표출되고 예비역도 소리를 높인다. 전쟁과 평화론으로 선거에서 재미를 단단히 본 좌파 세력은 내년 총선과 대통령선거에서 대대적인 평화 공세를 펼칠 것이다. 보수를 찍으면 전쟁이고, 좌파를 선택하면 평화라고. 햇볕정책은 그래도 따뜻한 이미지가 있는데 신평화주의는 전쟁 위협으로 국민을 협박하기에 질이 더 나쁘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보여주듯 북한의 김정일 정권 같은 비정상국가와는 어떠한 협상이나 달래기로도 평화를 살 수 없다. 튼튼한 국방으로 상대가 도발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이명박 정부의 성과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그래도 평가 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대북(對北)정책이다. 우리가 기만적 평화 공세에 흔들리지 않고 이 정부의 대북정책기조를 조금만 더 지속하면 결국 경제난에 처한 북한이 뭔가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지금의 번영을 유지하고 책임 있는 세계의 지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해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도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가 중국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끈기 있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
이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소신을 가지고 새로운 전쟁게임의 룰에 맞는 국군이 되도록 철저한 국방개혁을 해야 한다. 만약 이번에 적당히 ‘무늬만 개혁’을 해 우리 군이 또 다시 당한다면 역사에 오명을 남길 수도 있다. 적(敵)보다 성능 좋은 탱크와 대포를 가지고도 게임의 룰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처구니없이 당한 프랑스의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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