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자가 러시아인, 미국인, 중국인, 이스라엘인에게 “실례지만 육류 품귀사태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고 청하자 네 사람이 되물었다. “육류가 뭡니까?”(러시아인) “품귀가 뭡니까?”(미국인) “의견이 뭡니까?”(중국인) “실례가 뭡니까?”(이스라엘인) 물자가 부족한 러시아, 재화가 넘쳐나는 미국, 개인의 권익이 무시되는 중국을 빗댄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이스라엘인의 반응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인의 정(情), 프랑스인의 톨레랑스처럼 보편적 언어로 똑 떨어지게 번역하기 어려운 민족정서가 있다. 이스라엘인의 ‘후츠파’도 그런 정서다. 주제넘음, 대담함, 과감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태도 등을 뜻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집, 학교, 군대에서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도록 교육받는다. 학생이 교수를, 직원이 상사를, 병사가 장교를 대할 때도 이런 처신이 몸에 배어 있어 이방인에겐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 최근 내한한 ‘창업국가’의 저자 사울 싱어는 자원이 부족하고 안보가 불안한 이스라엘의 고속성장 비결로 후츠파를 꼽았다.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 원동력이라는 것.
후츠파는 이스라엘군이 막강한 군대로 성장하는 데도 한몫했다. 그들은 상관의 입만 쳐다보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한다. 계급보다 자질과 능력에 따라 임무가 주어져 많은 권한이 현장의 병사와 초급장교들에게 이관된다. 상관의 리더십이 흔들리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경질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계급과 권위에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군대는 평시에는 군기가 바짝 든 듯해도 실전에선 순발력과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해 실기(失機)할 위험성이 높다.
지난 현충일, 반기(半旗)를 달면서 아들뻘의 두 청년을 떠올렸다. 중이염 고통을 호소하다 계속 묵살되자 목숨을 끊고, 뇌수막염을 앓으면서 야간행군을 다녀온 뒤 숨져간 훈련병이다. 부실한 군 의료체계는 돈과 인력을 집중 투입하면 웬만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고, 아프다고 해도 ‘빠졌다’는 눈총만 돌아오는 군대는 정신 개조 차원의 치료를 요한다. 이렇게 침묵이 체질화된 군대에서 합리적 토론, 상향식 전술 혁신, 효율적 권한 이관, 주도면밀한 작전수행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직된 군대문화는 강군(强軍)을 키울 수 없다. 경직된 군대는 역설적으로 ‘예측 가능한’ 군대라 적의 도발을 자초한다. 영해를 침범해도 안이한 교전수칙이나 따지며 조준사격을 미루고, 영토를 포격해도 전투기들이 하릴없이 지시만 기다리며 공중 대기하리라는 걸 적이 알기 때문이다. 현장 지휘관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어떤 강도와 형태의 반격을 가해올지 모를 만큼 신출귀몰하는 군대라야 적은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유교문화권에서 ‘후츠파 군대’가 될 법한 얘기냐고? 우리 선조들에겐 후츠파가 무색할 기백이 있었다. 조선 인조 원년, 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는 경연(經筵)에서 인조가 좀 소극적으로 나오자 조정호(趙廷虎)라는 신하가 왕의 면전에서 가차 없이 일갈한다. “임금이 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인데, 전하께선 경연에 임해 문답이 적으신가 하면 대신의 말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려는 의도가 없으십니다. 정치 쇄신의 초기에도 이와 같으니 훗날의 일이 몹시 염려됩니다!”(오항녕 ‘조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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