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구제역에 유린당한 한국 축산

  • 동아일보

지난해 11월 경북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은 2개월 만에 전국 8개 광역시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동안 전국에서 262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매몰 처분됐고, 정부가 지불하는 보상비만 1조7387억 원이 들어갔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출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3조 원이 넘을 것이다. 최악의 구제역 사태는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와 일부 축산 농민들의 도덕적 해이가 초래한 인재(人災)로 확인되고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안동에서 구제역 의심 신고가 처음 있었던 지난해 11월 28일보다 최소한 열흘 전에 이미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경기 지역으로 번졌다고 밝혔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구제역 신고가 이뤄진 것은 지난해 12월 14일이다. 이때까지 경기 지역에는 방역초소가 한 군데도 설치되지 않았다.

현행 구제역 대처용 매뉴얼과 역학조사 방식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정부의 부실 대응을 초래했다. 매뉴얼에는 구제역 의심 증상이 나타날 경우 대처 요령은 있지만 감염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2주일 정도 되는 잠복기에 구제역이 다른 지역으로 번질 가능성에 대한 대책이 없다. 감염 경로의 추적을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므로 효과적인 사전 차단이 이뤄질 수 없었다.

정부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매몰 처분 정책을 고집하며 초기에 예방적 백신 접종 정책을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은 것도 정책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가축 전염병에 대한 대책은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정부가 ‘구제역 청정국(淸淨國)’ 지위를 유지하는 데 집착해 적절한 대응 시기를 놓친 것이다. 정부는 한국 축산이 구제역에 유린당한 뒤에야 새로운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뒷북을 치고 있다.

구제역 발생 국가에 다녀온 뒤 제대로 신고하지 않을 정도로 소독과 방역에 소홀했던 축산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구제역 확산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구제역 발생 국가를 방문하는 축산인이 하루 5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매몰 처분 가축에 대한 100% 실비 보상 제도가 축산 농민들의 무사안일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현재로서는 구제역의 추가 확산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설 연휴에 귀성과 축산농가 방문을 자제하고, 부득이 방문하더라도 차량과 사람에 대한 철저한 소독이 이뤄지도록 정부와 농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