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성철]자율형사립고의 예견된 실패

  • 동아일보

지난 정부는 경쟁력보다 기회균등을 더 중시하는 교육정책을 폈다. 2007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외국어고를 특성화고로 바꾸는 안을 내놓은 것도 외고가 교육기회 균등에 역행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점수 대신 등급만 반영하도록 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정부의 이런 정책들에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야당의 반대로 무산된 교육 정책이 적지 않았다.

그 시절 한나라당 교육정책의 원칙과 철학은 자율성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였다. 이를 통해 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세운 교육 공약의 기본 철학과 원칙 역시 같았다. 당시 이명박 대선 후보는 외고 폐지의 대안으로 자율형사립고 100개 설립 등을 주장했다. 다양한 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학교 간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자는 것.

한나라당이 야당 시절 반대하던 외고 폐지안은 여당이 된 2009년 정권 핵심 인사들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왜 그땐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2년 새 외고 입시가 만들어낸 부작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번 자율형사립고 미달사태는 교육정책의 원칙과 철학 실종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 학교의 자율성은 학생 선발과 교과과정 편성의 자율성이 핵심이다. 적어도 당초 취지는 그랬다. 하지만 추진과정에서 귀족학교라는 비판에 밀려 ‘자율 없는 자율고’가 탄생했다. 실패는 당연한 귀결이다. 일반고와 다를 바 없는 ‘무늬만 자율고’에 3배나 되는 등록금을 내고 자녀를 보낼 학부모가 많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2012년까지 자율형사립고 100개를 만들겠다는 목표에 사로잡혀 무리하게 학교 수를 늘린 것도 실패의 원인이다.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 사례가 최근 또 벌어졌다. 주인공은 대선 후보 교육공약 입안을 주도한 이주호 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다. 이 장관은 2007년 대선 직전 한 토론회에서 정부가 입시정책을 쥐고 흔들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당시 그가 했던 말 가운데 일부분이다.

“교육부가 대학의 학생선발 기능을 불신하고 획일적인 지침을 내리니까 입시문제가 난맥상을 겪는다. 학생 선발에서부터 대학의 자율성이 제약을 받는다면 선진국 대학과 경쟁이 가능할까.”

“교육부는 지난 10년 동안 입시문제로 고교와 대학을 규제해 왔다. 교육부의 관치(官治)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랬던 이 장관이 최근에는 논술을 보지 않거나 전형 비중을 줄이는 대학에 재정적 인센티브를 주겠단다. 예산 지원을 미끼로 대학의 학생선발 자율권에 간섭하겠다는 것이다. 그때의 이주호와 지금의 이주호가 같은 사람이 맞기는 한 걸까. 아니면 그가 과거에 비판하던 교과부 관료들에게 세뇌라도 당한 걸까.

물론 상황이 변하면 정책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변한 것은 교육적 상황이 아니다. 야당에서 집권당으로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다.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현 정권의 방향전환이 옳은지 그른지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적어도 노무현 정권의 교육정책은 나름의 원칙과 철학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홍성철 동아이지에듀 대표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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