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생활 5개월째인데 5년은 된 것 같다. 기업현장 경험만으로는 해결 못할 일이 널려 있었다. 오랫동안 날 괴롭힌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은’이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는 게 쉬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험난할 줄은 몰랐다. 국가 연구개발(R&D)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면서 동시에 혁신적인 부가가치까지 얹어야 하는 일들은 가끔 내 CPU(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러나 요즘 몸은 좀 고달프나 인생은 최고로 즐겁다.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을 즐겨 왔던 내게는 꼭 맞는 옷이다. 과분하게도 내 경험을 국가 정책에 이식할 기회까지 주어졌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 먼저 공무원들의 높아진 전문성과 사명감에 놀랐다. 세계 최빈국에서 13위의 경제대국을 만든 주역들의 눈빛에서는 자신감과 열정이 읽힌다. 아쉬움도 있다. 멋진 R&D 계획은 많지만 실천이 잘 따르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자기 일이 어떤 큰 계획 아래서 움직이는지도 모른 채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기도 한다.
메가트렌드 뒤쫓기만 하면 필패
국가 R&D의 관제탑이 될 메타플랜(Metaplan)을 서둘러 만들고 실천하는 일이 내게는 최우선이었다. 4개월 산고(産苦) 끝에 며칠 전 그 계획의 첫 단추인 ‘조기 성과 창출형 프로젝트’를 발표할 수 있었다. 3∼5년 내 시장 확보가 가능한 대형 과제들이다. 메가트렌드를 놓쳐서도 안 되겠지만 쫓아만 가서는 백전백패다. 지금 각 기업의 미래 관련 투자는 이를 쫓아만 가다 보니 내용이 거기서 거기다. 한 산업에서 1, 2, 3등을 하기보다는 3개의 산업에서 각각 1등을 하는 게 국가 전체 경쟁력 관점에서는 훨씬 더 바람직하다.
한국의 완성품 경쟁력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으나 부품소재, 장비, 인프라 등 요소 기술들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부가가치 중 많은 부분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고용 없는 성장’이 이슈가 됐다. 큰 우산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기술들의 수준을 같이 끌어올리는 ‘에코시스템’의 완성이 필요하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대기업과 중소, 중견기업의 동반 성장은 자연스럽게 실현돼 지원(支援) 논리로만 천착했던 중소기업 문제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의 테마와 스토리를 담은 R&D도 필요하다. 자동차 정보기술(IT) 조선 철강 원자력 같은 주력산업이 고르게 발전한 나라는 거의 유례가 없다. 여기에 날개를 달아 주면서 우리만의 부가가치를 가미한 한국형 프로젝트가 나와야 한다. 글로벌 트렌드라는 이유로 우리가 잘하지도 못하고 기반도 없는 기술을 엮어놓은들 승산이 있겠는가.
고용 창출 효과가 가장 큰 자동차, 배터리 기술 등을 활용한 전기차 기반 ‘그린수송시스템’, 2020년 반도체 통합 챔피언 등극의 토양이 될 IT 융복합 기기용 핵심 시스템 반도체, 건물 마을 도시 단위의 전기는 물론이고 열에너지 효율 향상도 종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세계 9위의 에너지 소비국이면서도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을 에너지 수출국으로 도약시킬 한국형 마이크로 에너지 그리드(Micro Energy Grid) 기술,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박막태양전지 기술,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제중신편 사상의학 등 풍부한 한의학 데이터베이스(DB)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선진국조차 진입 초기 단계인 천연물 신약 시장 선점을 노리는 한국형 천연물 소재 신약…. 이번 프로젝트들에는 위에 열거한 분야들이 최대한 스며들도록 노력했다.
2006년 세계 최고 반도체 학회인 IEDM의 기조연설에서 나는 퓨전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융복합 산업은 지금 미래 먹을거리 창출의 최대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이 융복합의 철학 역시 이번 프로젝트들의 저변을 관통한다. 융복합이야말로 단일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의 도전에 대응할 유일한 솔루션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미래 성장동력의 큰 두 축은 ‘녹색성장’과 ‘융합’ 촉진인데 후자는 아직 좀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느낌이다. 기존 개별 산업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법 제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융합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
실천 없는 계획과 제도는 무의미
금년 중 산업융합촉진법 제정이 정부의 목표다. 융합 신제품 적합성 인증제도 등을 도입해 현재 기준과 규격이 없는 융합 신제품을 신속히 인증하고 출시 지연을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 메타플랜, 법, 제도 다 좋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고속도로와 공항은 만들어 놓았는데 차도 비행기도 안 다닌다면 무슨 소용인가.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과거의 전철을 밟을 거면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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