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FTA 혜택도 못 챙기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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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7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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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유무역협정(FTA)은 때깔만 좋다. 발효국 16개국을 포함해 협정을 타결한 나라가 45개국으로 세계 5위 수준이지만 정작 국내 기업들은 FTA를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있다.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를 제외하면 FTA의 활용이 저조하다. 수출기업의 한-아세안 FTA 활용률은 11%에 그쳐 한국에 수출하는 아세안 기업의 활용률 49%에 크게 못 미쳤다. 국내 수출기업의 43%가 ‘FTA 활용 방법을 몰랐다’고 했다니 ‘FTA 허브’라는 수사가 공허하게 들린다.

본격적인 FTA는 내년이 시작이다. 내년 7월 한-유럽연합(EU) FTA의 잠정 발효에 이어 한미 FTA 발효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전체 무역 중 FTA 발효국과의 무역 비중이 현재 15% 선에서 36%로 껑충 뛴다. 기업의 FTA 활용 여부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EU FTA는 다른 FTA에 비해 훨씬 까다롭다. 인증수출자(Approved Exporter) 제도 때문이다. EU는 원산지 관리를 잘한다고 수출국 관세청이 인증한 기업에만 특혜관세를 적용하고 편의를 제공한다. 과거엔 각국 관세청이 능력껏 위반사항을 적발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수출입 기업의 자율에 맡기되 잘못되면 책임을 엄하게 묻는 방식이다.

EU의 평균 관세율은 5.6%이고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 섬유 등의 관세는 12∼17%에 이른다. 대부분의 한국산 공산품에 적용되는 관세는 점차 낮아져 2014년 0%가 되는데 인증이 없으면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다. 변동욱 관세청 FTA 이행팀장은 “수출기업의 기록에 관계없이 건건이 심사하는 미국은 인증을 요구하지 않지만 인증이 있으면 심사 대비가 훨씬 수월하다”고 조언했다.

그런데도 기업들의 준비는 더디기만 하다. 지금까지 LG디스플레이 삼성전자 현대모비스 등 세 회사만이 인증수출자로 지정됐다.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5개사가 관세청의 심사를 받는 중이다. 국내 수출기업 1만 개사, EU에 수출하는 기업으로 한정해도 7700개사가 내년 6월까지 인증을 받기가 벅찰 수밖에 없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정부가 4월에야 관련 법제를 만들 만큼 대비가 늦었고, 기업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는 타성 때문에 준비가 크게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수억 원씩 투자해 원산지 관리용 전산시스템을 갖출 기업은 많아야 수십 곳이다. 그렇지만 대기업이 제품의 원산지를 판정하려면 중간제품과 원료의 원산지를 알아야 하므로 중소기업도 원산지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원산지 관리는 모든 기업이 해야 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챙겨 대비하는 게 최선이다. 중소기업은 관세청 홈페이지에서 원산지 관리 프로그램 ‘FTA-PASS’를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다.

EU는 중국산 제품이 한국산으로 둔갑해 관세특혜를 받을 가능성을 우려해 원산지 검증을 까다롭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납품업체의 공장까지 직접 방문해 검증을 한다. EU와 미국은 실수든 고의든 원산지 위반이 적발되면 무거운 벌금을 물린다. EU는 1975년 역내 인증수출자 제도를 의무화해 36년째 운용 중이다.

우리 기업은 순발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이 선진국의 성장경로를 단축해 압축성장을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 8위 수출국의 주요 기업이 순발력만 믿고 있다가 원산지 증명도 못해 허둥대거나 잘못될 경우 벌금이 무서워 FTA 혜택을 포기한다면 딱한 일이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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