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달과 송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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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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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주변에서 말렸을 법하다. 영화평론가가, 그것도 암 수술로 아래턱을 절제하고 튜브를 통해서만 영양을 공급받는 사람이 언감생심 요리책을 쓰겠다고 나섰을 때 말이다. 맛을 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로저 에버트 씨는 끝내 꿈을 이룬다. 밥솥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조리법을 모아 책을 펴낸 것이다.

시련에도 행복을 꽃피운 사람들

그의 이름이 어딘지 귀에 익은 듯하다면 영화 팬임이 분명하다. 68세의 에버트 씨는 미국의 전설적 영화평론가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먹는다는 행위의 ‘원초적 즐거움’을 잃어버린 이 유명인사가 그토록 애틋하게 그리워한 것은 음식과 더불어 식탁에서 나누던 일상의 대화와 웃음. 그 정겨운 분위기였다. 자기는 다시는 맛의 쾌락을 느낄 수 없어도 사람들에게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래서 맛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추슬러가며 맛깔스러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상상력과 경험을 토대로 만든 실용적인 레시피를 소개하는 책으로 이어진 것이다.

맛볼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상하기 힘든 역경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만족이란 원하는 것을 죄다 갖춰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그는 몸으로 입증했다.

한 컷짜리 만화를 그리는 지현곤 씨가 자신의 인생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달달한 인생’이란 책에서도 그런 깨달음을 얻게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척추결핵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뒤 바깥출입을 포기하고 만화책을 베끼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는 이제 당당한 카툰 작가로 평가받는다. 따스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카툰으로 공모전에 잇따라 입상했고 미국 뉴욕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거동이 힘들어 어른 셋이 들어서면 꽉 차는 좁은 방에서 ‘바위처럼’ 머물고 있는 그에게는 출입문을 열어놓고 달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방이 북향으로 기울어 있는 데다 집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빠금히 스쳐가는 달의 얼굴을 보기조차 어려워졌다. ‘남향의 방에서 일년 내내 매일 달을 볼 수 있는 것’을 간절한 소망으로 꼽는 그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남향집이 아니라도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밖으로 걸어 나가 달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처지임을 나는 감사해본 적이 있는가.

하기야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의 시간을 거친 뒤에야 물 한모금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평범한 우리네 아닌가. 세상이 내민 카드에 비해 훨씬 불리한 패를 집어 들고도 제 것 아닌 더 나은 무엇을 욕망하기보다 지금 가진 카드로 삶을 알뜰하게 꾸려가는 두 사람.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말이 빛바랜 진리가 아님을 깨우친다.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푸념하기보다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팍팍한 세월을 견디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아끼는 지혜인가 보다.

추석엔 가족들과 충만한 감동을

연중 으뜸가는 명절이 돌아오고 있다. 이번 추석에는 가족 친지와 한데 모여 넉넉한 보름달을 바라볼 때도, 쫄깃한 송편 한 개를 입에 물고 밀린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충만한 감동을 발견하고 싶다. 아무리 삶이 힘겨워도, 내세울 성취가 없다 해도 단맛 신맛 짠맛 쓴맛을 느끼고 내 뜻대로 따라주는 이 한 몸에 감사하는 작은 호사는 누리고 싶다.

‘고통받고/또 고통받을 때/아프고 또/아플 때/자신과 잔혹한 싸움이 시작됩니다/고맙습니다/치유는 어렵지만/견딜 수 있는 아픔을 주어/고통받는 생명이라도/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믿게 해주어 고맙습니다/더하여 고통도 행복이라/여기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김초혜의 ‘고맙습니다’)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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