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창혁]성미산의 정의

  • Array
  • 입력 2010년 9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공교롭게도 MB가 ‘공정한 사회’를 꺼내들 때부터 나의 ‘정의와의 씨름’도 시작됐다.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에서 ‘당신 자녀 학교 담장 너머 사립학교가 들어선다면?’이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본 이후다.

홍익대 사범대 부속 초등학교와 여중고의 성미산 이전을 둘러싼 갈등 스토리였다. 해발 66m의 서울 마포구 성산동 동네 뒷산은 웬만한 스타 못지않게 유명세를 타 온 ‘명산(名山)’이다.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가 어제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처럼 젊은 부모들이 십오륙 년 전부터 세낸 가정집의 마당을 손질하고 지붕을 수리하고, 야외극장에서 함께 노래 부르며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를 ‘우리 아이’로 키워온 마을이다.

사립 초중고 건립 둘러싼 갈등

서울 같은 거대 도시 한가운데서 자연과 인간, 생명의 조화로운 동거를 꿈꾸며 어린 세대를 키워가는 성미산 마을은 ‘미래의 소중한 유산(遺産)’이 될 만하다.

그런 성미산 자락을 깎아내 다른 곳도 아닌 사립 초중고교가 들어온다고 하니 분노가 터진 것이다. 더구나 공사가 끝나면 홍익대 부속 초등학교와 공립 성서초등학교가 거의 담 하나를 사이에 두게 된다. 예쁜 교복을 입고, 근사한 스쿨버스로 등교하는 귀족학교 대 평민학교의 위화감부터 떠오른다.

성미산 갈등을 보면서 정의를 생각한 것도 그런 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의 정의감에 반(反)한다는 뜻이다. 서울시의회 성백진 의원(민주당)이 얼마 전 시정질문을 통해 “성서 아이들이나 학부모로서는 날벼락이다. 사립과 공립 초등학교가 담 하나를 맞대고 붙어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느냐”고 따진 것도 부정의(不正義)에 대한 추궁이었다. 오세훈 시장이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 것 역시 정의의 퍼런 서슬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기분은 분명 정의감에 반하는데 ‘무엇이 부정의인가’에 대해서는 좀처럼 답안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귀족학교 vs 평민학교도 정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념논란에 가깝다. 내 집 아이는 국산 소형차 타고 다니는데 옆집 아이는 비싼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법철학을 공부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까지 지낸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도 ‘성미산의 정의’를 물어봤다. 하지만 그도 “(홍익이) 초등학교는 지금 자리에 놔두고 여중고만 옮기면 좋을 텐데…”라고 말꼬리를 흐렸을 뿐 질문의 본질(정의)에 대해서는 코멘트를 하지 못했다.

혹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홍익초교를 찾아가 봤다. 성서는 필자의 아이도 다녔던 학교라 따로 가보진 않았다. 수업을 파했는지 아이들이 짝을 지어 나왔다. 홍익인가 했더니 서강초교라고 했다. 홍익의 최태만 교장은 “22년 동안 근무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서강 아이들이 위화감을 느낀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고 했다. 서강 교감선생님이 바로 지금의 성서 교장선생님이니 한번 물어보라고도 했다. 학교시설이나 환경은 서강이 더 나은 듯 보였다. 홍익은 홍익대 앞의 그 유명한 소비문화에 포위돼 있었다. ‘사립학교=귀족학교’라는 것도 혹시 1970, 8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추첨으로 뽑을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사회적 지위도 기업체 과장, 차장 정도라고 했다.

우리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은?

그럼 홍익의 학생, 학부모들이 성서가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나 몫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롤스의 정의론으로도 답을 찾기 어려웠다.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다자간 협의체를 구성해 답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결과도 결과지만 ‘성미산의 정의’를 풀어나가는 오늘, 우리의 의식수준과 문제해결 능력이 궁금하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c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