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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오늘과 내일/허승호]부안의 길, 경주의 길, 세종의 길

입력 2010-06-29 20:00업데이트 2010-06-30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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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광재 강원지사 당선자를 인터뷰했다. ‘참여정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그는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방폐장 문제 해결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두 가지라고 대답했다.

한미 FTA도 그렇지만 방폐장 역시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격렬한 반대를 넘지 못하고 19년간 표류하던 방폐장을 경주가 흔쾌히 수용토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당시 정부가 경주에 제시한 지원 내용을 따져 보면 부안 위도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예산지원 규모도 3000억 원으로 같았다.

이광재 씨의 자랑, 방폐장 선정

달라진 것은 경로였다. 그전까지는 정부가 용지를 일방적으로 선정해 ‘떠맡기는’ 방식이었다. 안면도, 굴업도를 옮겨가며 용지를 찾아봤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2005년 정부는 방폐장 지원조건을 먼저 공개한 후, 유치희망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찬성률이 가장 높은 곳에 낙찰되도록 절차를 바꿨다. 그러자 경주 포항 군산 영덕 울진 5개 시군이 경쟁에 나섰다. 지자체장 읍면동장 시의회 지역상의 문화예술단체 등이 주민 설득에 열을 올렸다. 투표 결과 경주가 89.5%의 찬성률로 1위였고 방폐장을 ‘따냈다’. 축제 분위기였다. 경로 디자인에 따라 결과는 이처럼 달라진다.

반면 세종시 수정안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제시된 혜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역사 앞에 떳떳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진정성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경주가 아니라 굴업도-위도의 자취를 밟았기 때문이다. 때론 내용보다 경로가 중요하다.

올바른 세종시 해법은 충청에 주도권을 맡기는 것이었다. 중앙정부는 기준만 제시하고 충청의 대표들이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토록 한다. 수용하기 힘든 대안이 나올 경우 수정 협상한다. 결렬되면 물론 원안으로 간다. 만약 충청이 대안 제시조차 거부한다면 깨끗이 포기한다. 이런 방식이라야 수정 가능성이 쪼금 열린다.

만약 충청이 논의를 주도하는 위치였다면 대의(大義)를 선취할 수도 있었을 게다. 예컨대 “충청은 대대로 충절의 고장이다. 국가의 먼 미래를 생각해 우리가 먼저 양보하겠다”고 나올 가능성도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정부는 충청에 수정안 마련을 맡기는 대신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한 뒤 정부 수정안의 심의를 맡겼다. 위원 23명 중 충청 몫은 6명. 그중 3명은 고향이 충청일 뿐 활동무대가 서울이었고, 나머지도 ‘친정부’ 지적이 나오는 인사들이었다. 이런 위원회로는 절대 안 된다.

꼭 민관위 방식으로 가겠다면 ‘충청 출신 서울사람’이 아니라 ‘충청에 살고 있는 지역대표’를 대거 포함시켰어야 했다. 충청권 대학의 총장, 지역 원로, 당해 지역 이장,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지역 시민단체 인사… 이들 중에서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충청사람들이 수정안의 내용을 한 번쯤 들여다보기라도 한다.

갈등관리 필요한 상황 또 온다

충청사람들은 ‘신행정수도→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방적인 계획 변경을 한 차례 경험했다. 또다시 불쑥 수정론을 내놓으니 “핫바지로 보냐”는 불쾌감이 터져나왔다. 공정성에 대한 의심도 컸다. 여기에 친박, 야당 등 정치세력이 편승하자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되면 보상도, 지원사업도 다 소용없다는 식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정책 마련의 첫 단계부터 주민이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강영진 성균관대 교수·갈등해결학)

9개월간 나라를 뒤흔들던 세종시 수정안은 ‘플러스알파’ 논쟁만 남겨둔 채 어제 소멸했다. 하지만 ‘갈등 예방과 관리’의 지혜가 필요한 상황은 언제든 다시 온다. 반드시 반복된다. 세종시 수정안이 물 건너갔다고 해서 그것이 남긴 교훈까지 잊어버린다면… 그런 나라는 미래가 어둡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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