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부터 닷새 동안 태국 방콕의 반정부시위 현장을 취재했다. 언제 실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현장을 지키고 있던 5000여 명의 시위대 ‘레드셔츠’는 투사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검게 탄 얼굴에 외국인 기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수줍어하던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위에 나선 것에 대해 “빈민과 농민의 편이라고 믿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억울하게 축출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18일 밤 정부와 시위대가 대화 재개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번 사태가 평화롭게 끝나 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결국 대화는 무산됐고 19일 장갑차를 앞세운 강제해산으로 시위가 일단락됐다. 이날에만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자는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태국 정치인들은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대립의 양축인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와 탁신 전 총리 외에도 태국 정치의 중심에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군부가 있었지만 아무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물론 현재 태국 정치를 이끌고 있는 아피싯 총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그는 ‘피해자’일 수 있다. 2007년 말 총선에서 친(親)탁신계 정당이 승리했지만 옐로셔츠의 시위, 군부의 압력,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 등으로 결국 아피싯 총리에게 권력을 내주었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정치인으로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치인이 국민을 볼모로, 더욱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권력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태국 국내외 언론은 7일 아피싯 총리가 조기 총선을 제안했을 때가 대형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평가한다. 이를 수용했더라면 적어도 이후에 희생된 54명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대가 이 제안을 끝내 거부한 데에는 탁신 전 총리의 뜻이 반영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시위대 강제해산 이후에도 “앞으로 (시위가) 게릴라전으로 발전할 것”이라며 폭력 시위를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탁신 전 총리가 권력을 되찾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든 적어도 국민의 피를 요구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이 지켜야만 할 마지막 도리일 것이다. ―방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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