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훈]2009년의 숙제, 분열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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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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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달력에는 어느덧 마지막 장 하나만이 남아 있고, 필자가 금년에 이 지면을 통해서 독자와 생각을 나눈 것도 이번 칼럼이 마지막이 된다. 자연스레 지난 1년의 한국정치를 돌아본다. 우리 정치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교차했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분열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표면화했다는 점이다. 지난봄 이래로 이명박 정부는 중도실용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면서 정권의 재정비를 꾀했다. 그런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우리는 다시 중도나 통합보다는 강력한 분열의 기운과 마주하고 있다.

분열의 촉매제는 세종시였지만 사실 분열의 뿌리는 세종시 논란보다 깊고 넓다. 게다가 분열의 바이러스는 비단 여당과 야당 사이뿐만 아니라 여당 내부에, 야당 내부에까지 두루 퍼졌다. 여권 내부의 분열을 보자. 여권 내 분열의 뿌리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만 필자는 그보다 훨씬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여권이 세종시, 미디어법 등의 핵심 이슈에서 갈라지는 현상은 무엇보다 정치제도와 정치문화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몇 년 사이 우리 정치권은 권력을 나누는 이른바 분권화 제도개혁을 강화했다. 대통령의 여당 총재 겸직을 금지하는 당정 분리라든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원과 시민의 몫을 강화한 것은 좋은 사례이다. 오랫동안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의 폐해에 시달려온 우리 형편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분권개혁이 환영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권의 내분과 진보의 위기

문제는 대통령과 여당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이후 경선 결과의 승복에 따라 유력한 차기주자가 당내에 머무른다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지만 정치 문화는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는 데 있다. 공식적으로는 분리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청와대와 여당이 과거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경선과정의 경쟁자였던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자신들이 속한 정당의 먼 미래를 향해서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여권의 분열은 변화의 쉬운 단계(제도의 변화)는 넘어섰지만 좀 더 어려운 단계(문화와 행동양식의 변화)에서 주춤거리는 우리 정당의 현실에서 비롯됐다.

여권의 분열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분열의 정도는 오히려 더욱 복잡한 것이 야권과 진보세력 전반의 분열이다. 지난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이 두 개의 정당으로 분열된 데 이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의 여당은 민주당과 친노 신당으로 갈라지고 있다. 어쩌면 내년 6월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4명의 야당 후보와 싸우게 될 수 있다. 이 같은 범진보세력의 분열에 대해서 다양한 진단이 제시됐지만 필자는 이 같은 분열의 근본 뿌리는 진보 철학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한국의 진보가 보수보다 이론적으로 정교하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진보는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환경에 이론적으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 노사관계 못지않게 도시 주변부의 비공식부문 노동자, 한계중산층과 88만 원 세대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기에, 진보정치세력은 다양한 취약계층을 묶어줄 정치개념을 창안하지 못했다. 미국의 영향력 퇴조 혹은 영향력 행사 방식의 변화라는 새로운 흐름 앞에서도 통합된 비전을 만들지 못했다.

오늘날 범진보세력의 문제는 단순히 여러 세력을 묶어줄 걸출한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또 손학규 전 대표와 같은 중량급 인사가 민주당 밖에 머물고 있어서가 아니다. 범진보세력의 근본적 문제는 여러 갈래로 분열된 세력을 묶어주는 공동의 비전을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대북 화해정책의 뒤를 이을 새로운 정치철학의 빈곤이라고나 할까?

정당, 통합보다 갈등 부추겨

끝으로 여야 간의 분열이다. 고려대 이내영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자면 여야 의원의 이념적 분열은 보수-진보성향의 시민 사이의 이념적 거리보다 심하다. 대북지원, 한미동맹 등의 이슈에서 여야 의원의 견해차는 일반 시민보다 더 벌어져 있다. 달리 말해 제도권의 여야 정당은 시민의 이념갈등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데 더 앞장선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치인의 선명성 경쟁을 분열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권 내의 분열, 진보 내부의 분열이 이 같은 여야 간 분열을 더욱 부추기는 궁극적 원인인 것은 아닐까?

민주정치란 뛰쳐나가려는 분열의 힘과 안으로 잡아당기는 통합의 힘 사이의 팽팽한 균형 위에 서 있다고 보면, 2009년에 이 같은 불균형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여권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신문화를 고민하고, 진보세력이 내부통합을 우선과제로 삼을 때에만 분열의 과속질주를 멈출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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