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경제 연착륙…한·중·일에도 긍정 신호” 폴 새뮤얼슨 교수

  • 입력 2007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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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파 경제학의 거두인 폴 새뮤얼슨 미국 MIT 교수가 그래프와 수식으로 가득한 자신의 교수실 칠판 앞에 섰다. 그는 “우리는 효율은 극대화되지만 불평등과 불확실성도 커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스턴=이정은  기자
신고전파 경제학의 거두인 폴 새뮤얼슨 미국 MIT 교수가 그래프와 수식으로 가득한 자신의 교수실 칠판 앞에 섰다. 그는 “우리는 효율은 극대화되지만 불평등과 불확실성도 커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스턴=이정은 기자
《노교수의 책상에는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가 가득했다. 교수실 벽에 붙어 있는 칠판에도 X축, Y축의 좌표 위로 그어진 곡선과 각종 수식이 빽빽했다. 낡고 빛바랜 칠판 위에는 최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듯 하얀 분필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는 흥미롭다는 듯 숫자를 쳐다보는 기자에게 “어제 내가 쓴 것”이라고 말했다. 92세인 그는 요즘도 매일 교수실에 나와 각종 매체에 연재하는 경제칼럼을 쓴다. 2007년의 경제전망을 듣고 싶다는 기자에게 그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미국경제부터 시작할까”라고 말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미국은 대혼란의 시기다. 국민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라크전쟁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돼 버렸다. 자살폭탄은 계속 터지며 미국의 자녀들은 군대에서 죽어간다. 부시 대통령을 지지했던 공화당 지지자들조차 이제는 부시 대통령이 능력 있는 지도자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다른 이야기다. 어쩌면 정치와는 반대로 기분 좋은(cheerful) 이슈가 될 수 있다. 각종 지표를 볼 때 미 경제는 연착륙할 것으로 본다. 특히 낮아진 실업률은 긍정적인 신호다. 부동산 경기는 더 침체될 가능성이 있지만 급격히 붕괴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의 경제 악화만큼이나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는데….

“비관론자들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유가 상승, 둘째는 주택경기 거품의 붕괴 가능성이다. 그러나 유가는 지금까지도 불안정한 변수였고 최근에는 오히려 안정되는 추세다. 주택경기가 급격히 위축되면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의 재산 손실이 엄청날 것이다. FRB나 월가의 투자자 그 누구도 이를 원하지 않는다. FRB가 조만간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가능성은 10∼15% 될까…. 행여 인플레이션 과열을 막으려는 시도가 진행된다 해도 곧바로 경기침체로 연결되지는 않을 거다.”

―그런 상황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경제에 미칠 영향은….

“한국 일본 인도 중국 같은 나라는 대부분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가.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줄곧 국제무역 수지가 적자다. 큰 소비자인 미국 경기가 유지된다면 다른 나라의 경제에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나는 여섯 자녀의 아버지다. 올해 7월에 60세가 된 맏딸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50대 즉, 베이비붐 세대다. 어마어마한 수의 베이비부머들이 저축해 놓은 여유자본도 많다. 이라크전쟁이 군비지출로 대표되는 수요를 계속 창출하기 때문에 적자상황이 호전되는 효과도 있다.”

―달러 약세 현상은 계속될까.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강한 달러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달러 약세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러 약세는 미국 물품의 수출을 촉진시켜 무역적자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달러는 앞으로 6개월 안에 반짝 강세를 보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약세가 지속될 것이다. 유로의 강세는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의 선진국 중심이 아니라 스페인 핀란드 같은 신흥국가 중심으로 진행될 것으로 본다.”

새뮤얼슨 교수는 미국 경제의 흐름을 언급하면서 여러 차례 세계화를 언급했다. 미국의 실업률이 낮아지는 것은 후발국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갈 곳을 잃은 노동자들이 조건이 훨씬 나쁜 일자리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최저임금을 인상했을 때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빈자(貧者)들의 형편은 몇 푼 더 받는다고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빈부 격차는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인가.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현상을 가져 온다. 첫째는 승자와 패자가 뚜렷해지고 그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직과 자본가, 억만장자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릴 것이다. 두 번째는 인생의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과거처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을 보라. 과거에는 40년씩 기업을 운영했는데 요즘은 임기가 5년도 안 되지 않나. 날카로운 칼이 머리 위에 매달린 가운데 일하는 상황이다. 결국 우리는 효율은 극대화되는 반면 불평등과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한국 경제로 주제를 옮겨보자. 우선 북한이 미칠 영향이 궁금하다.

“외국인투자가들이 북핵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고 이해할 만하다. 북한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정권이다. 너무 압박하면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무모한 공격을 해댈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북한이 바로 같은 언어, 같은 이름을 쓰는 옆 나라를 공격할 가능성은 낮다. 바람이 불면 자신들도 방사능 피해를 보게 될 정도로 가까우니까…. 그나저나 요즘 한국인의 반미 성향이 좀 강해지지 않았나? 솔직히 (미국은)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받을 짓을 해야지, 깡패처럼 굴어서 무슨 좋은 소리를 듣겠나.”

―내년 중국 경제의 흐름은 어떨까.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시장경제가 ‘자유로운’ 나라다. 사회주의 시절 죽었던 시장이 부활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교육받은 값싼 인력도 충분하다. 앞으로도 9∼12% 경제성장을 계속해 미래의 가장 큰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본다. 부시 대통령이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중국 상품의 저가 공세는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 신흥국가들에 위협적인데….

“땅덩이와 경제규모가 크다고 해서 곧바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스위스 같은 나라는 아주 작지만 번영을 이뤄냈다. 또 월마트의 값싼 물건이 많이 팔린다고 다른 시장들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고급시장은 어차피 따로 굴러간다. 고부가가치의 다른 시장을 얼마든지 창출해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한국을 포함한 소위 ‘아시아 5룡’이 급성장할 때도 그것이 미국 경제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는 크지 않았다. 경제규모가 작은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면 경제블록을 형성해서 자유무역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지 않아도 현재 한미 간 자유무역협정(FTA) 논의가 진행 중이다.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멕시코와 캐나다, 미국이 함께 만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예로 들겠다. 장담하건대 멕시코가 미국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손해본 것도 아니다. 모두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보호주의는 일종의 질병(disease) 같은 것이다. 어디에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보호주의를 선호한다. 그들은 어떤 변화가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기존의 익숙했던 것들이 흔들리면 극렬히 반대하게 돼 있다. 나는 5년 뒤 세계적으로 보호주의가 오히려 강화됐다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을 거다. 미국 내에서도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가.”

인터뷰가 두 시간을 넘어서자 교수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렸다.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 저물녘 미국 보스턴 케임브리지 MIT는 적막했다. 그러나 새뮤얼슨 교수는 갈 채비를 하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났지만 그는 “남아서 할 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며 악수를 청했다.

방을 나서는 기자를 보며 그는 수식으로 채워진 서류와 뉴욕타임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90세가 넘은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보스턴=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폴 새뮤얼슨 교수는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신고전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 교수와 함께 현대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장으로 꼽힌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47년부터 MIT 교수로 재직해 왔다.

미 경제학협회 및 계량경제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경제정책 자문을 맡았다. ‘경제이론분석의 기초’를 비롯한 경제학계의 선구적인 저서들로 3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 석학 대열에 올랐다.

그가 저술한 ‘경제원론’은 18쇄까지 개정판이 나왔으며 전 세계 41개국 언어로 번역돼 400만 권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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