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긴급제언]김기환/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자

  • 입력 2000년 11월 9일 19시 08분


“한국경제에는 중장기적 발전 전략이나 목표가 없다. 당장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경제에 더 절실한 것은 미래를 향한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이다.” 김기환(金基桓)미디어밸리회장은 한국경제의 중장기 목표로 ‘큰 싱가포르’를 제시했다. 아시아 지역의 중심 경제센터인 싱가포르처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김회장은 “그러기 위해선 외부에 대해 더 열린 마음, 우리의 지정학적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중장기적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보는가.

“무엇보다 우리에겐 장기적인 국가발전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다시 경제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그런 목표가 없는 것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국민들은 행동에 나서게 돼 있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일류국가’ ‘신통상국가’라는 목표는 너무 막연하다. 과거 정권들이 정의사회 민족자존 신한국 등의 목표를 들고 나왔고 지금은 민주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 등을 내걸고 있지만 모두 추상적이다. 우리의 역사와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세계 어느 나라나 내걸 수 있는 목표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한마디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걸 단순히 구호로만 부르짖지 말고 국가 발전목표로 삼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큰 싱가포르’가 되자는 얘기다. 싱가포르와 홍콩 두 나라가 아시아 지역의 경제활동중심지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역할을 지향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강점은 무엇인가. 또 우리에게 ‘큰 싱가포르’가 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나.

“싱가포르는 다른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군사력이 없지만 안보를 걱정하지 않는다. 이 나라를 비즈니스 센터로 이용하는 다른 나라들이 싱가포르의 안보를 걱정해주기 때문이다.우리는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반도라는 특수성은 주변 정세가 불안할 때는 불리하지만 다행히 최근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싱가포르와 달리 민주주의가 정착돼 있고 고급인력도 많다.”

―홍콩 싱가포르와 비교해 우리에겐 언어소통 같은 한계가 있지 않은가.

“아니다. 언어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안 된다. 싱가포르만 해도 60년대 후반 개방화에 나설 때 200만 국민 중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2만∼1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언어가 아닌 언어 뒤의 의식이다.”

―중국과의 마늘 문제도 그렇고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문제 등도 그런 의식의 문제인가.

“그건 의식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정부의 구조적인 문제다. 국익 차원에서 정부 내에서 조정 해야 했다. 칠레와의 무역협정이 포도 문제로 걸려 있는 것, 미국과의 투자협정에서 스크린쿼터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정부의 조정기능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오랫동안 개방, 열린 마음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는데 개방은 왜 필요하며, 한국이 이젠 많이 개방됐다고 보는가.

“나라나 기업이나 잘 되려면 재주 있는 사람이 모여야 한다. 자국 사람만 갖고는 안 된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경이 생산요소 이동을 막을 수 없는 시대다. 자본이고 정보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한나라의 경제정책이 글로벌화(세계화) 되지 않으면 자본은 일시에 떠나버린다. 외국기업은 물론이고 국내 자본도 마찬가지다.

개방은 이제 비교우위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또 옛날엔 단순히 시장개방을 의미했으나 이젠 제도 개방까지 망라된 총체적인 것이 돼야 한다.”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 내 사업환경에 대해 많이 지적하는 게 부패문제인데….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두 가지가 부패와 노사문제다. 부패란 결국 규제와 통해 있다. 한국엔 불필요한 규제가 너무 많다. 정부는 규제를 많이 풀었다고 하지만 외국인들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비하면 멀었다’고 한다. 우리로선 10년 전에 비해 좋아진 것이지만 외국인들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비교한다.

또 우리의 노사관계는 산업사회 초기의 스타일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근로자들은 사회변화에 대해 배타적이다. 외국기업에서는 노사분쟁을 일으키는 걸 애국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좋은 규제개혁 방안이 있는가.

“규제 수를 단순히 줄이는 건 한계가 있다. 인허가 절차 대목대목마다 규제가 있어서 10개중 9개의 규제를 풀어도 나머지 1개가 발목을 잡는다. 결국은 인위적인 규제 대신 ‘시장’에 맡긴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가령 한 명의 피해자가 소송에서 이기면 같은 피해를 당한 모든 소비자도 보상을 받는 ‘집단소송제’가 활성화되면 굳이 정부가 소비자 피해를 막는다며 규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수 만 가지의 규제를 만들어서는 국민만 범법자로 만들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정리〓이명재기자>mjlee@donga.com

▼김기환 약력▼

△미국 그린넬대, 예일대 대학원 졸업

△미국 UC버클리대 경제학박사

△1970∼76년 미국 오리건주립대, 포틀랜드주립대 교수

△1982∼83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1983∼84년 상공부 차관

△1993∼97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이사장

△1998년 이후 ㈜미디어밸리 회장

△저서:한국경제발전의 이념적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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