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상 영광의 얼굴들]수상소감과 공적

입력 2000-09-19 19:21수정 2009-09-22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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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인촌상 수상자가 선정, 발표됐다. 문학 산업기술 언론출판 공공봉사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영광의 얼굴들. 특히 올해 수상자는 3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여 눈길을 끈다. 이번 심사는 부문별로 4, 5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3개월에 걸쳐 공정하게 진행됐다. 수상자 네 분의 삶과 공적 사항, 수상 소감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인촌상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문학-박완서씨▼

문학부문 수상자 박완서(朴婉緖)씨는 올해 고희를 맞았다. 불혹의 나이로 여성동아 장편공모에서 ‘나목(裸木)’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한 지 30년.

문단 안팎의 지인들이 기념행사를 제안했으나 “떠들썩하고 튀는 일은 잘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계간 ‘실천문학’에 연재해 온 ‘아주 오래된 농담’을 마침으로써 5년 만에 장편소설을 완성시킨 일로 조용히 30년을 기념하려 했다. 인촌상 수상 소식은 오랜만의 휴식기에 날아온 ‘떠들썩한’ 소식이 됐다.

“상을 준다 하면 과연 내가 자격이 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해서 고민이 더 많은 게 사실이에요. 어려운 시기를 민족의 앞에서 열심히 헤쳐나간 인촌의 이름, 앞서 상을 수상한 훌륭한 선배들의 이름을 기려 기쁘게 받고자 할 따름입니다.”

고희에도 그가 선보이는 작품세계는 언제나 신선하고 젊다. 최근 끝맺은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그는 돈과 자본주의에 의해 굴절되고 변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한 인물묘사와 함께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

다음번 장편으로는 생애 첫 역사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서 속에 화석화(化石化)해 버리지 않고 싶은 두셋의 얘기”라고 그는 말했지만 생각이 영글기 전에는 주인공을 밝히지 않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요즘 생활요? 눈뜨면 마당으로 나가 봉숭아, 분꽃 같은 작은 화초를 돌보죠. 태풍에 쓸려나간 자그마한 꽃들이 안쓰럽지만, 이제부터 피는 꽃들도 또 있으니까….”

젊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충고를 묻자 작가는 “생각이 미처 고이기 전에 퍼내지 말라. 전력투구와 자기소모를 혼동하지 말라. 밀실에서만 쓰지 말고 경험을 넓게 쌓으라”는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공적사항◇

데뷔작 ‘나목’(1970) 이후 50여편의 장단편소설과 에세이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통해 인간심리의 양면성과 사회의 모순을 파헤쳐 왔다. 분단 및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일제지배와 사회구조의 변화를 다룬 ‘미망’(1985), 가족 상실의 아픔을 다룬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89) 등 모든 작품에서 작가는 사소한 일상과 한정된 범위의 인간사에서 출발, 섬세한 감성과 치밀한 묘사 속에 삶의 다양한 의미와 풍경을 뜨겁게 포용해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고 199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산업기술-안철수씨▼

산업기술부문 수상자인 안철수연구소 안철수(安哲秀·38)대표는 “너무 큰 상을 받게 돼 어깨가 무겁다”면서 “후보가 될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역대 수상자들이 적어도 한 분야에 수십년 동안 공헌해 온 원로 대가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30대인 안대표의 수상은 파격적인 일이다. 그만큼 안대표의 공적이 독보적이고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안대표는 전세계적으로 컴퓨터바이러스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88년 컴퓨터바이러스 연구에 뛰어들었다.

“의과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시간을 낼 수 없어 남들이 잠든 시간인 오전 3시부터 7시까지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안대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프로그램을 개발, 무료로 배포했다.

그는 현재 직원이 120여명인 대형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백신프로그램을 무료배포하는 원칙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우리 회사가 매년 수백억원의 수입을 포기하는 대가로 우리 사회 전체가 수천억원의 이득을 볼 수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그 이유.

회사운영비는 기업을 상대로 보안프로그램을 판매하거나 컨설팅을 해 벌어들인다. 올해 예상 매출액이 200억원, 예상 세후 순이익은 60억∼70억원에 이른다.

안대표는 97년 미국 맥아피사로부터 안철수연구소를 최소 1000만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국내 대표적인 소프트웨어회사를 외국기업에 넘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컴퓨터 보안 분야에 관한 한 우리 기술력이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반드시 얻어내겠습니다.”

그는 최근 확고한 국내 기반을 발판으로 미국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천광암기자>iam@donga.com

◇공적사항◇

88년 뇌(c브레인)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했을 때 퇴치프로그램 ‘백신’을 개발, 무료배포했다. 안대표는 이를 ‘V2’와 ‘V2+’를 거쳐 91년 유명한 ‘V3’로 발전시켰고 계속 업그레이드해 왔다. 95년 컴퓨터바이러스 공동연구를 위해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6월 안철수연구소로 개명)를 설립했다. 일반인들에게 바이러스 상담서비스를 해주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바이러스동향을 발표, 바이러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넓히고 피해를 예방했다. 98년 9월 아시아안티바이러스연구협회 부회장에 선임됐으며 현재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부회장, 한국통신정보보호학회 이사, 벤처기업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언론출판-김성재씨▼

출판사 사장보다는 유능한 편집자로 불리길 더 좋아하는 출판인, 일흔 셋의 나이에도 직접 교열을 보며 한 자의 오자(誤字)도 용납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출판인, 김성재(金聖哉·73) 일지사 (一志社)사장.

출판 부문 수상자인 김사장의 소감은 의외로 담담했다.

“선배 중에도 상을 못탄 사람이 있고, 후배 중에도 상탈 만한 사람이 많은데…. 출판인들에게 주는 상이 적어 좀 섭섭했는데 이번에 인촌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1949년 청소년잡지 ‘학원’의 초대편집장으로 출판과 인연을 맺은 김사장. 56년 무일푼으로 일지사를 차린 이후 그의 출판 인생 반세기는 고집스럽고 꼿꼿한 삶이었다.

“얼마전 황순원선생 빈소에 갔더니 장남 황동규교수가 누구한테 나를 이렇게 소개하더군요. ‘출판계의 황순원’이라고…. 허 참, 내가 이런 얘기를 하니 좀 민망한데요.”

학술 출판은 출판의 뿌리라는 믿음으로 출발한 출판 인생. 그는 한번도 이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한국학 관련 학술 서적에 관한 열정은 1975년 ‘한국학보’ 창간에서 가장 빛났다. 적자를 감내하고 100호까지 펴냈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김사장. 한국학보 게재 원고를 일일이 직접 교정을 볼만큼 그 애정도 대단하다. 자주 만나는 학계쪽 사람도 한국학보 편집위원인 김윤식 신용하 한영우 서울대교수 등. 김윤식교수와는 주말마다 가볍게 등산도 한다.

일지사는 현재 적자다. 하지만 한국학 관련 학술출판에 관한 그의 신념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원고 교열과 편집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교정보고 편집하는 사람은 저작물에 대한 최초의 비판적 독자이자 그 원고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입니다. 그 즐거운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공적사항◇

1956년 도서출판 일지사를 세운 이래 한국학 분야의 학술도서와 양서를 출판했고 이를 통해 한국학과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해왔다. 지금까지 700여종의 책을 펴냈고 이것의 대부분이 한국학 관련 서적. 1975년엔 한국 최초의 한국학 전문지 ‘한국학보’를 창간해 2000년 가을호로 통권 100호를 돌파했다. 적자를 감수하고 발행하는 한국학보는 국어국문학 국사학 민속학 인류학 고고학 미술사학 등 한국학을 발전시키고 젊은 학자를 발굴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출판의 이론과 실제’ ‘출판현장의 이모저모’ 등의 책을 지어 출판인의 자질향상을 도모했다.

▼공공봉사-조아라씨▼

“평소 존경하는 민족지도자 인촌(仁村)선생의 유지가 깃들인 큰상을 받게 되니 기쁨에 앞서 별로 내세울 것 없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됩니다.”

공공봉사부문 수상자 조아라(曺亞羅·88·광주YWCA명예회장)여사는 해방전 여성들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는 일로 사회활동을 시작,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몸바쳐 온 국내 여성계 선구자다.

그는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와중에서 더욱 어둡고 어려운 삶을 이어 온 우리 여성들이 이만큼이나마 당당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괄목할 만하다”며 “우리 사회발전의 증거인 동시에 내 일생의 보람”이라고 되새겼다.

구순을 눈앞에 두고 청력이 떨어져 다소 불편을 겪고 있지만 광주 북구 유동 YWCA회관에 자주 들러 후배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며 각종 모임에도 나가 여전히 명쾌한 논리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청중을 휘어잡는다.

그는 “독립운동 관련 사실은 정작 광주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라고 묻자 70년전 주동자로 몰렸던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과 관련된 ‘백청단 은지환사건’을 금세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해 낸다.

“엄동설한에 가둬 두어도 입을 열지 않은데다 일경들도 18세라는 나이가 안쓰러웠는지 한달여 만에 풀어줬다”며 “당시 꽁꽁 언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울었던 동아일보기자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20대에 남편을 잃고 광주YWCA를 조직하고 건물을 마련한 일이 자랑스럽다”는 그는 특히 성빈여사(聖貧女舍)를 거쳐 국내외 각 분야에 자리잡은 1000여명의 전쟁고아소녀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성빈의 딸’로 부르며 흐뭇해한다.

그의 인품과 열정에 감복한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선생은 소심당(素心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했다.

<광주〓김권기자>goqud@donga.com

▼공적사항▼

일제하에서 폐쇄된 광주 YWCA 재건에 참여,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활동했고 6·25전쟁 후 ‘성빈여사’를 설립, 불우아동 복지사업을 시작해 오늘날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소외계층 여성의 직업훈련과 사회적응을 위해 62년 설립한 ‘계명여사(啓明女舍)’는 현재 ‘계명여성복지관’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영세민자녀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3년제 야간중학 ‘호남여숙’을 설립, 배움의 혜택을 주었다. 66년에는 법률을 통한 여성들의 권리향상을 위해 가정법률상담소를 개설하는 등 어려운 시대에 여성과 불우계층의 앞길을 밝히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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