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그 아름다운 삶]손봉호/대가 바라지않아 더 빛나는…

  • 입력 2000년 5월 14일 19시 29분


3월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 미래’의 설립은 우리 사회의 기부 문화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우선 출연자들이 모두 벤처기업가란 사실이 눈에 뜨인다. 기부에 비교적 소극적이던 종래의 기업 문화에 새로운 형태의 기업인들이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그 이익을 쓰는 것도 기업의 목적이란 새 인식을 심었다는 것이다.

그 실현이 모두 확실하지는 않지만 법인 창립 이후에도 근 100개의 벤처기업가들이 출연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5명의 출연자가 하나의 법인을 세우고, 그 법인으로 하여금 출연금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것도 새로운 발전이다. 100억원이 넘는 거액을 내놓고도 출연자들이 어떤 권리도,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인 것이다.

사실 기부란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공익과 선한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재산을 바치는 것이므로, 반사이익을 전제하는 기부는 엄격한 의미에서 기부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투자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는 우선 선진국에 비해 기부 행위가 흔치도 않았거니와 기부 자체도 대부분 생색을 내고 인정을 바라면서 이뤄졌다. ‘아이들과 미래’의 창립은 그런 기부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함을 시사해 주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은 종교의 특징이며 신실한 종교인의 의무다. 종교에 따라서는 ‘내세에서의 보상’을 바라보고 차세(此世)에서 선을 행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돈, 권력, 명예 같은 세속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투자의 성격을 가졌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명령하고, 신실한 종교인은 순수한 마음으로 재산을 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고등 종교 신도들이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데도 올바른 기부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은 우리 심성에 깊이 뿌리내린 무속신앙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무속은 우선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지 않고 운수(運數), 재수(財數)에 모든 것을 맡기며 귀신에 뇌물을 주고 빌어야 복을 받지 선행을 한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님을 믿는 원시적 기복 신앙(祈福信仰)이다.

고등 종교들이 전래하고 크게 성장해도 그런 기복 신앙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동화하고 말았고 부정적인 특징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말았다. 우리의 이런 종교 상황이 기부를 장려할 수 없었고 투자가 아닌 순수한 기부 문화를 꽃 피울 수 없었다.

돈이면 안될 것이 없다는 배금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사회에서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바치는 것은 최고급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특정한 종교의 가르침에 기초하지 않았어도 그런 선행 자체가 이미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기부에 인색한 한국의 종교계가 그 맛을 잃어버렸음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질책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미래’가 한국 종교계에도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

손봉호<서울대교수·'아이들과 미래'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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