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삶의 여유와 다양성이 살아있는 술문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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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벨기에 스타일에 연연하지 않는 레시피로 만든 화이트 맥주. 미국산 발렌시아 오렌지 필을 쓰고 오트밀과 밀을 사용해 입안에서 크리미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순하고 신선한 맛이 난다.―맥주도감(일본사단법인 일본맥주문화연구회 외·한스미디어·2016)》

오렌지 슬라이스를 곁들여 먹으면 좋은 미국 맥주 블루문(Blue moon)에 대한 설명이다.

5년 전쯤 처음 블루문을 접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그전까지 내게 맥주는 그저 쓰고 탄산 많은 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식 때면 늘 소주를 섞어 들이켜는 ‘폭탄주 제조용’ 술. 하지만 지인의 권유로 블루문을 처음 만난 순간, 코끝을 상큼하게 치고 들어오는 오렌지 향기에 눈이 번쩍 떠졌다. 들이켠 맥주가 입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고 난 뒤 꽃향기와 홉향의 여운이 남았다.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맥주도감’에서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 맥주의 성분, 향, 맛, 유래를 분석한 일본맥주문화연구회와 일본맥주저널리스트협회는 다양한 맥주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자도 해외를 다닐 때면 그 나라의 특색 있는 맥주를 찾곤 한다. 베트남에 갔을 때는 끼니때마다 사이공 맥주를 시켰다. 쌀국수, 분짜, 바인미 등 베트남 음식과 함께 먹는 사이공 맥주는 꿀맛이었다. 일본에서는 초밥과 함께 먹는 기린 생맥주의 달달함에 하루 여행의 피로가 풀리기도 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친한 지인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되도록 다양한 종류의 맥주나 술을 파는 곳을 찾는다. 여럿이 둘러앉아 서로 다른 종류의 맥주를 시켜 놓고 시음도 해보고, 이 맥주는 맛이 어떻다 의견도 나눈다. 자연스레 술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으로 대한다. 덜 취하고, 더 재밌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다행히 최근 국내에서도 술과 관련된 규제가 많이 풀리고 수제 맥주 산업이 성장하고 있어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의 술 문화도 다양하고 유연하게 변했으면 한다. 특히 회식문화. 매번 모든 참석자가 묻지도 않고 똑같은 소주와 맥주를 섞어 반복적으로 들이켜고 뻗은 뒤 해산하는 문화는 이제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다. 각자가 서로 맛과 향이 다른, 좋은 술을 시켜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음미하는 그런 회식은 언제쯤 가능할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임박한 지금, 삶의 여유와 다양성이 술자리에도 찾아오길 기대한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맥주도감#술문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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