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원재/연금의 정치학

입력 2004-06-02 18:47수정 2009-10-0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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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지난달 22일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일본정가에선 “고이즈미씨는 운이 억세게 좋거나, 정치단수가 높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 나돌았다. 여론의 관심을 북-일 정상회담으로 돌려 자신의 ‘국민연금 미가입’ 스캔들을 은근슬쩍 잠재웠기 때문이다. 정부 2인자인 관방장관과 제1야당 대표가 연금 미납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 퇴진한 터라 고이즈미 총리의 위기탈출 행보는 정적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연금 파문은 일본 국회가 보험료는 높이고 급여액은 낮추는 ‘연금개혁법’을 심의하면서 시작됐다. 일본의 노후연금은 직장인 대상의 후생연금과 자영업자(국회의원 포함)가 가입하는 국민연금의 두 종류다. 출산율 저하와 평균수명 연장으로 보험료를 받는 사람은 늘어나고 내야할 사람은 줄어들면서 연금재정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애써 연금을 내봐야 늙어서 받기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미납률은 40%에 육박한다. 연금제도를 고치겠다는 정치인까지 미가입한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들의 연금 불신은 정치권을 향한 성토로 번졌다.

▷한국에서도 국민연금관리공단과 네티즌간의 연금논쟁이 치열하다. 연금문제의 근본원인이 노인인구 증가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는 두 나라가 비슷하다. 한국에선 경기침체까지 겹쳐 연금을 붓기가 더 힘들어졌다. 일본은 연금지급액이 급여의 50%를 넘느냐, 못 넘느냐가 쟁점이지만 한국은 연금이 바닥날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연금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현재 110조원을 넘는 기금이 2046년에는 ‘0원’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한국정계의 주도세력은 언론, 사법, 교육 등 분야별로 개혁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개혁의 절박성’을 강조한다. 국민연금처럼 ‘화끈하지 않은 분야’의 개혁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린다. 서민들에게 노후생활을 지탱할 최소한의 안전판인 연금문제만큼 절실한 게 또 있을까. 연금 스캔들로 일본 정치인들이 스타일을 구겼지만 다음 세대의 문제를 미리 고민한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연금문제에 태평인걸 보면 한국 국회에는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들만 모인 건가.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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