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의 영화이야기]영화촬영후 첫 '러쉬 시사'

  • 입력 2001년 12월 6일 18시 21분


영화 촬영이 끝나면 ‘러쉬(rush·거칠게 순서만 이어맞춘 최종 편집 전의 필름) 시사’를 한다. 오랫동안 정성을 쏟은 영화가 처음으로 형태를 갖춰 나오는 ‘러쉬’를 볼 때면, 난 개봉 당일보다 더 가슴이 두근거린다.

투자자 제작자 기획자 등 대여섯명의 관계자만 보는 러쉬 시사는 냉정하다. 아무리 공들여 찍은 장면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덜어내자고 결정하는 것도 이 때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기가 등장한 장면이 잘려나갈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특별 출연했던 차승원씨도 자신이 등장한 장면들이 모두 잘려나는 아픔을 겪었다. 경찰서에서 난동부리는 코믹한 상황을 열연했는데 러쉬 때 몽땅 잘려나가 차승원씨가 이 영화에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톱스타 S는 러쉬필름을 안 본다. 자타가 공인하는 연기파 배우인 그이지만 자신의 연기가 어떻게 나올지 가슴이 떨려서란다. 반면 꼼꼼하고 섬세한 L배우는 러쉬시사는 물론, 편집 할 때도 늘 찾아와 사사건건 자기의 신에 대해 애정표현(?)을 한다. 감독은 귀찮기도 하겠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예뻐보이는 애교다.

러쉬 때 누구보다 가장 긴장하는 이는 역시 감독이다. 자신을 벌거벗은 채로 드러내는 것이니까(러쉬 필름에는 효과음이나 배경 음악이 없다). 상당수 감독들은 차마 투자자나 제작자와 같은 편집실에서 러쉬를 보지 못하고 옆 편집실에서 따로 본다.

배짱강한 중견 감독인 K 감독은 러쉬시사 때면 사우나 간다며 슬그머니 사라지고, 지성적인 C 감독은 편집실 밖에서 줄담배를 피워댄다. 패기만만한 L 감독도 일부러 늦게 온다. 물론 죽자사자 러시도 함께 봐야 속이 후련하다는 오만방자한(?) 김상진 감독같은 이도 있지만.

러쉬 시사를 마칠 때마다 난 감독들에게서 핏기가신 얼굴을 본다. 피를 말려가며 하는 작업, 그래서 수혈을 해가며 하는 영화작업. 이런 감독들이 있어 오늘 한국 영화가 또 빛을 발하며 달려가는 게 아닐지….

<좋은 영화사 대표>greenpapaya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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