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규제 만능주의 행정]현실외면한 규제 부정 키워

  • 입력 1999년 5월 26일 09시 00분


《지난해 IMF가 터진 이후 외국인 자본이 몰려들면서 제일 먼저 볼멘소리로 꺼낸 것이 ‘한국은 규제왕국’이라는 불만이었다.

물론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 발전전략상 각종 규제가 불가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사회는 점차 개방과 자율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업체들은 여전히 각종 규제를 비켜나가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규제를 피해나가는 것이 규제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십년간 우리나라의 규제는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양산해 온 한 축으로 작용했다.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규제, 규정이 애매모호한 규제, 동일 사안에 대해 여러 부처에서 중복되는 규제들….

전문가들은 “한국의 규제시스템에서는 부정부패라는 ‘곰팡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규제개혁의 칼을 본격적으로 빼들고 나섰다. YS정권 초기 등 과거 몇 차례 시도했던 규제개혁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수없는 실패가 증명하듯 규제와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기는 쉽지 않다. 그 원인과 대안을 취재했다.》

서울 종로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윤철수(尹澈洙)씨는 ‘도로점용료 부과’를 놓고 지방자치단체 등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91년부터 연 8만원 가량의 간판에 대한 도로점용료를 내온 윤씨는 주위 업주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보니 정말 바보짓을 했더라고요. 인근 업소들은 지난해 하반기 세수확보를 위한 불법간판 단속이 있기 전까지 아예 허가 신청도 하지 않았어요. 어떤 업주는 담당 직원에게 뇌물을 건네면서까지 허가를 받지 않았죠. 도로점용료를 안 내려고 말입니다.”

그는 특히 간판이 도로를 점유하지 않았더라도 옥외광고물관리법 조항에 따라 돌출간판 허가신청을 한 업소에 무조건 도로점용료를 부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조항은 옥외광고물관리법과 도로법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또 지난해 하반기에 불법간판 단속이 시작되면서 간판업체가 해야 하는 안전도검사를 구청이 대행하며 업체당 2만여원을 받고 있지만 검사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행정편의적 규제시스템이 부정부패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정부도 이같은 점을 인식, 1만1천2백25건의 규제사항 중 절반에 가까운 5천3백26건을 폐지하는 대규모 규제개혁을 진행중이다. 이중에는 소방검사 횟수를 줄이고 식품접객업의 영업시간을 폐지하는 등 부정부패의 창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조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같은 조치로 규제와 부정부패라는 고질적인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비현실적인 규제가 부패를 부른다〓전경련 규제개혁센터 신종익(申鍾益)부장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비현실적인 규제의 남발은 사실상 무규제나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환경부가 정한 건설공사장의 소음 진동규제기준은 근본적으로 이행하기 어려운 사항. 환경부는 공사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70㏈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국립환경연구원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원천적으로 굴착기 등 기계에서 발생하는 소음 자체가 78∼81㏈로 주변 소음과 합쳐지는 합성소음도는 이보다 큰 85.0∼86.4㏈에 이른다. 중견건설업체인 D사 환경팀의 한 관계자는 “방음벽을 설치하더라도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관할 구청에서는 2,3일이 멀다 하고 점검을 나오니 어쩔 수 없이 돈봉투를 건넬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전국에 자동판매기사업을 하고있는 김모씨(36)는 위생교육 때문에 본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다. 자동판매기 위생교육은 각 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별도로 실시하기 때문에 위생교육이 있을 때마다 전국 25개 시도를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4시간씩 열리는 위생교육에서는 같은 내용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부실하다”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육에 빠지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 유흥주점의 경우 일반조항 46개, 시설기준 40개, 영업자 준수사항 22개에 건축법 소방법을 합쳐 지켜야 할 조항이 1백개를 훨씬 넘는다. 여기에는 행주에 세균이 몇 마리 있어야 하는지, 환기구의 위치는 어디로 향하고 있어야 하는지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규정돼 있다.

서울 강남구청 보건위생과 이경재(李敬裁)과장은 “규정대로 단속하면 안 걸릴 업체가 없으니까 담당 공무원들이 부정의 유혹을 느끼는 것”이라며 “단란주점에 여자를 고용할 수 있지만 손님과 배석할 수 없다는 몇몇 불합리한 조항도 문제”라고 말했다.

▽부패고리 왜 끊기 어렵나〓비현실적인 규제를 현실화하고 규제숫자를 줄여가는 게 부정부패를 줄이는 해답이라는 것에는 어떤 전문가도 이견이 없다. 그런데 왜 오랫동안 규제와 부정부패의 고리가 끊기지 않는 것일까. 우선 ‘위와 아래의 생각이 따로 따로’라는 점이다.

의정부시는 정부가 규제개혁의 하나로 토지형질변경 허가시 주민등록등본 농지원부 소유농지현황 건축물관리대장 등의 서류를 요구하지 않도록 했으나 이를 계속 시행하다 지난달 규제개혁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이같은 사례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홍익대 김종석(金鍾奭·경영학과)교수는 “정부가 의지를 갖고 규제철폐에 나서는데도 일선현장의 공무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해당 분야 공무원들의 전문성 부족도 규제를 현실에 맞춰 바꾸는 것을 어렵게 하는 요인.

한국행정연구원 김태윤(金泰潤)규제개혁연구센터소장은 “미국은 몇 평방m에 어느 정도 규모의 스프링클러를 써야 하는지 등 세세한 기술코드가 2백개를 넘지만 우리는 축적된 관련자료가 미흡해 세세한 규제를 만들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밖에 규제해제가 곧바로 자신들의 역할 상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공직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취재팀<오명철팀장 이병기 이철희 박현진 윤종구 부형권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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