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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우리거리 읽기]광주 금남로

입력 1999-05-10 19:20업데이트 2009-09-24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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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邑城)도 문루(門樓)도 허물어졌다. 세상이 바뀌면서 세워지기 시작한 관청과 기차역은 우리의 도시 구조를 새롭게 엮어가기 시작했다. 광주도 다르지 않았다. 도청 앞의 새 거리는 광주를 대표하고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길이 되었다.

광복이 되었을 때 길은 바뀌지 않았어도 이름은 바뀌었다. 메이지마치(明治町)는 금남로(錦南路), 그 이면의 혼마치(本町)는 충장로(忠壯路)가 되었다. 조선 시대의 무신 정충신(鄭忠信·1576∼1636)장군의 군호와 김덕령(金德領·1568∼1597)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을 각각 따왔다.

광주는 뒤안길에 있었다. 낮은 도로율, 복잡한 골목길은 변하지 않았다. 대지는 잘게만 나뉘어 있었다. 도시의 한가운데, 도청 앞에 일제시대의 주택이 보란 듯이 남아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그렇다고 금남로마저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광주의 얼굴이 아닌가. 자동차들 다니라고 확장도 되었고 지하상가도 생겼다. 광주일보사옥만 덩그라니 보이던 거리에 고층건물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큰 길, 큰 건물을 좋아하는 건 바로 은행. 돈을 다루는 회사들이 금남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금남로에 간판을 걸지 않고는 광주에서 은행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바둑알이 커지는데 바둑판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머니가 빈 도시에서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투자는 요원하기만 했다. 덩치 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주차장에서부터 생겼다. 주차장 진입로는 이면도로에 내라는 것이 교통공학의 기본원칙. 그러나 그 이면도로도 드물 만큼 광주 도심의 도로망은 우마차시대를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자동차도 사람처럼 금남로에 입구를 장만했다. 광주 최고의 간선도로에 주차장 출입차량이 걸리적거리니 자동차 주행속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보도는 주차장 진입로 때문에 토막토막 잘린다. 건물 전면에는 주차장 입구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다. 거리는 그만큼 어두워졌다.

건물의 1층은 은행 영업장의 몫. 주차장은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계단으로 걸을 수 없다. 경사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지하층이 깊어지면 경사로는 길어지고 그만큼 가용면적이 줄어든다. 좁기만 한 대지에서는 경사로도 줄여 짜내야 했다.

찾아낸 고육책은 주차장을 반지하로 만드는 것. 경사로는 짧아지지만 1층은 당연히 도로보다 높아져야 한다. 시민들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은행은 자본의 신전인가. 예탁(預託)을 하러 가면서도 신탁(神託)을 받으러 가듯 계단을 올라야 하는 건물은 아름답지 않다.

사진기로 보는 금남로는 화려해졌다. 그럴수록 눈높이로 보는 거리의 모습은 황량해지기만 했다. 좁은 대지에 법규가 허용하는 한 가장 큰 건물을 만들자니 남는 공간은 자투리 뿐. 법규는 여기에 미술장식품과 국기게양대와 조경도 해놓으라고 요구했다.

금남로에서 조각은 미술작품이라기보다 남는 땅에 끼워 넣은 애물이 되었다. 조경은 도시를 푸르게 하는 공간이 아니고 건물을 거리와 갈라놓는 장애물이 되었다.

금남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YMCA. 화려한 치장은 없다. 남들처럼 높다란 로비도 없다. 그러나 기꺼이 1층을 파내고 그 공간을 시민들과 나눈다. 터놓은 입구는 충장로와 연결되어 시민을 위한 통로가 된다. 어디에도 ‘무장경관경비중’ ‘CCTV녹화중’이라고 써 붙인 푯말은 없다.

건물에서는 문화교실이 끊이지 않는다. 간판도 가지런히 줄을 맞춰놓고 있다. 밤이 되어 간판의 불이 켜질 때 그 불빛은 시민의 발치도 밝히도록 꼼꼼히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언제나 젊고 환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한 뼘이라도 더 짜내 임대면적을 늘이자는 상업주의는 이 건물을 보고 반성하라. 3년 전에 지은 그대들의 궁전이 날로 쇠락의 길을 걸을 때 30여년 전에 지은 이 소박한 건물이 아직 그렇게 밝은 이유를 생각하라. 건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값비싼 재료가 아니고 시민들의 해맑은 미소. 그 미소를 담지 않는 건물은 이 거리를 어둡게만 만든다.

도청 앞에는 분수가 있다. 멀리서 사진 찍기 좋은 분수. 우리의 분수는 그 밑 지하상가에 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아도 물소리, 음악소리가 가득한 곳.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만남의 광장. 거리를 빛내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고 젊은 웃음소리. 밝은 햇살은 자동차에게 넘겨준 채 어두운 지하로 젊은이들을 내몰고 남은 거리는 그래서 슬프다. 이 거리에 햇살은 언제나 비치려나.

광주가 우리나라의 십자가라면 도청은 그 교차점이다. 아름다운 붉은 벽돌 건물에 흰 페인트를 뒤집어 씌운 이는 누구인가. 예향(藝鄕)의 자존심은 건축적 무례함에는 기어이 침묵하던가. 도청 앞에는 5·18민중항쟁 알림탑이 서있다. 대망의 80년대. 하지만 그 시대는 수확의 만종소리가 아니고 가쁜 총소리로 시작되었다.

자동차를 위해 넓힌 길로는 엉뚱하게 탱크와 줄을 맞춘 군화가 들어섰다. 금남로에는 “해제하라, 물러가라, 석방하라”는 함성이 가득했다. 세월이 흘러 그날의 함성이 지하철공사장의 소음에 묻혀도 그 항쟁의 정신을 잊지는 말자고 알림탑은 이야기한다. 나란한 영어 번역은 생경해도 이 곳이 항쟁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알림탑 옆에는 웬 나무가 한 그루 나란히 서있다. 제32대 도지사 취임기념식수. 1998년의 어떤 취임식이 1980년 이 땅의 함성만큼 뜨거운 것이었다고 믿는 이는 누구일까. 시민의 피가 물든 성역 위에 이름 석자를 과시하듯 드러낼 만큼 역사 앞에 도도할 수 있는 이는 이 땅의 어디에 있을까.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이 땅의 정의.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고 이야기하는 이는 누구인가. 일본이 사죄를 하였느냐고 묻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사죄를 한 적이 있던가. 우리의 90년대는 70년대에 잘못 끼운 단추를 풀고 여미는데 소진되었다. 80년대의 단추는 언제 제대로 끼울 것인가. 대망의 21세기는 우리에게 언제쯤 시작될 것인가.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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