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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우리거리읽기]자유가 숨쉬는 부산 광복동

입력 1999-05-04 10:19업데이트 2009-09-24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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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역사책에는 일본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어자천하지대본(漁者天下之大本)’이 아닌 나라에서 바닷가에 도시가 들어서기는 어려웠다. 백성들은 동래 읍성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고 경사 가파른 부산포(釜山浦)에는 쓰시마섬(對馬島)의 왜구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책에 일본이라는 이름이 굵은 고딕체로 등장하면서 그 모습도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말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한 항구, 부산은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이 아닌 일본의 항구, 일본인의 도시였다. 집을 만들어 담을 치고 나면 남는 공간이 길이 되던 우리의 도시, 그래서 구석구석의 막다른 골목은 조선시대 도시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의 근대적 도시구조를 이 땅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해변의 산비탈 부산에서 그나마 평지는 지금의 광복동 주변. 길다란 직사각형의 격자 가로를 만들고 상수도도 놓았다. 상륙작전의 교두보가 마련되자 점점 많은 일본인들이 이 거리에 등장했다. 일본이 조선의 주인노릇을 하면서 부산은 동래를 제치고 이 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경부철도의 개통으로 부산은 단번에 한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은 사라졌다. 징용, 징병을 나갔던 동포들도, 태평양을 건너온 구호물자도 부산항에 내렸다. 눈물 속에 빈손으로 귀환한 동포들도 이 거리에 정을 붙이고 머물기 시작했다. 다음 사건은 한국전쟁.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를 떠난 배는 남으로, 남으로 흘렀다. 일제의 격자도시 광복동엔 그렇게 한국사회가 들어섰다.

세월은 흘렀어도 광복동은 여전히 부산의 도심. 광복동에는 테두리가 없다. 광복동은 광복동이고 남포동도 광복동이다. 행정구역이 어찌되었건 이 동네의 거리는 모두 광복동으로 통한다. 광복동 거리는 평등하다. 길의 넓이들은 달라도 덜 중요한 골목은 없다. 더 중요한 시민도, 덜 중요한 시민도 이 거리에는 없다. 주머니 사정이 다를 뿐이다. 주머니가 가벼우면 먹자골목 좌판에서 오징어무침을 먹고, 여유가 있으면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수중전골을 주문하면 된다. 유명한 외제 손가방을 상표가 보이게 들고 다녀도 눈길을 주는 이는 없다. 인접한 국제시장에서도 똑같은 상표의 손가방을 판다.그것도믿어지지않는가격에.

일본인이 계획한 거리였지만 지금 광복동은 우리의 거리다. 우리의 인생살이를 담는다. 부산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아도 팝콘보다 굳이 오징어를 씹는 것이 우리다. 퇴근시간이 지나면 도심에 사람들이 사라져서 유령의 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심공동화(都心空洞化)이론’. 미국의 도시에나 맞는 이야기로 우리 도시를 설명할 수 있던가. 자정이 되면 제발 집에 돌아가라고 애걸하며 도심 밖으로 사람들을 몰아내야 하는 곳이 우리의 도시다. 시민의 에너지가 어디에나 가득한 도시. 용광로처럼 이들을 뒤섞어 놓는 도시. 그런 도시가 아름답다. 그런 사회가 건강하다. 그러기에 광복동은 아름답다.

광복동의 길은 좁다. 그 길에 인파가 가득하니 자동차가 오가려면 진땀을 흘려야 한다. 보행자전용도로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보행자만 다닌다. 그 중 넓은 도로, 광복로에서도 차도보다 보도가 더 대접을 받는다. 횡단보도는 있으나 신호등은 없다. 그냥 길을 건너면 된다. 자동차를 가지고 지나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곳, 누구나 평등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곳, 이것이 제대로 된 도심의 모습이다.

이곳의 중심은 극장골목. 부산국제영화제(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PIFF)는 이 환경을 이용한 탁월한 아이디어. ‘1996년 부산 국제영화제의 창설을 기념하고 영원히 발전시키기 위하여 여기 PIFF 광장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구리판도 만들어 거리에 깔았다. 프랑스 칸 영화제를 슬쩍 견주기도 한다. 권위는 아직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초대받은 ‘관계자’가 아니면 영화는 길거리에서나 보라는 그들. 그에 비해 우리 영화제는 젊고 열려있기에 더욱 광복동답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노점은 이 거리의 또 다른 에너지. 그러나 노점도 서야 할 자리는 따로 있다. PIFF 광장의 기념판, 상징조형물 기단은 노점의 떡상자며 물통, 양념통 올려놓는 자리로 변했다.

새로 단장한 보도블록 위로 콜라, 사이다를 실은 트럭들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정성들여 깔아놓은 돌은 죄 깨져 나갔다. 영원히 발전시키자는 길의 모습이 왜 이 모양인가. 대한민국 제1의 항구도시가 보여주는 문화수준은 프랑스의 시골 해변도시를 따라갈 길이 없는가.

광복동도 변했다. 얼음과자를 팔던 석빙고는 사라지고 이국적 이름의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들어섰다. 미화당백화점도 거리에 이름만 남기고 이사를 했다. 그러나 부산에서 아직 일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일본의 물장구는 현해탄의 물결이 되어 부산항에 포말을 만든다. 가라오케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이 바로 이 거리. 중앙로 건너 자갈치 시장에서는 생선회한접시가아닌‘사시미한사라’를판다.

단 한번도 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라,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계급 동결로 대를 이은 직업계승이 일상화된 나라, 그 일본이 차곡차곡 쌓아 온 문화의 깊이는 무시할 수 없다. 일본에도 고급문화가 있고 저급문화가 있다. 그러나 민족감정으로 쌓아올린 장벽 틈으로는 저급문화만 스며들었고 그 통로는 부산이었다. 누가 문화를 전해주었느냐고 족보만 뒤적이는 사이 소문은 부풀려졌고 신비화만 계속되었다. 그들은 벗기고 우리는 그것을 베낀다는 기묘한 이해(理解)와 이해(利害)구조가 만들어졌다.

일본의 전통건축이 근대 세계건축사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아시아의 현대건축은 일본의 건축과 일본 이외의 건축으로 나누겠다는 것이 서양의 입장이다. 미술인들 다른가. 영화인들 다른가. 굳이 덮고 비하할 필요도, 신기하고 놀랍다고 호들갑 떨 필요도 없다. 비판할 건 비판하되 인정할 건 인정해야 그릇도 커지고 담을 것도 많아진다. 바깥을 가둘수록 갇히는 것은 우리. 찬물에 세수한 그대의 맑은 눈으로 보라.

일본은 부산의 업보인가 화두인가.

서현<건축가> 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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